=====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33) 김동규 - 허송세월한 예과 2년

김동규 | 서울대 의대 교수


학교 정문에서 어린이 키만한 몽둥이를 들고 복장을 검사하는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님도 안 계셨다. 수업도 하루에 서너시간밖에 없었다. 세상 사는 맛이 났다. 대학입시 준비로 찌든 고교 3학년 생활과는 비교도 안되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예과 때 놀지 않으면 평생 후회가 될 테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교가는 몰라도 되지만 ‘예과 노래’는 꼭 알아야 한다며 “노세 노세 예과 때 놀아, 본과 가면 못 노나니…”라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예과란 의예과이고 본과는 의과대학을 뜻한다. 해방감과 성취감에 한껏 들뜬 스무살도 안된 어린 학생의 가슴에 그대로 녹아드는 감미로운 유혹이었다. 수업에는 영 관심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여대생과 미팅도 하고 젊음을 만끽한다며 싸구려 안주에 이기지도 못하는 소주를 마셔댔다.
낙제를 겨우 면한 형편없는 성적표를 손에 쥐고도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우는 것이 진짜 예과 생활이라며 친구들과 괜스레 명동이나 무교동 거리를 왔다갔다 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려면 2년간의 의예과를 수료해야 했다. 지금은 의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지만 당시는 의예과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친 후 의과대학에 진입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예과 교육이 필요한 까닭은 분명했다. 의사는 병이 아닌 사람을 치료해야 하므로 전인교육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방법을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잡은 것이었다. 독서와 수준 높은 강의를 통해 부족한 인문학과 인생 경험을 배우고 의사로서 또 의학자로서 뜻을 넓게 펴기 위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이들끼리 어울려 거리를 쏘다니며 노는 것을 전인교육으로 오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당시 예과생을 가르치던 교수님들은 각 분야에서 쟁쟁하던 분들이었다. 이런 훌륭한 분들에게 값진 지식을 전수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이처럼 삐딱한 생각을 한 것은 순전히 내 책임이다. 게다가 자기합리화 명분은 많았다. 주변의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었고, 당시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2년이라는 세월을 허송했다. 되돌아보면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부정하는 말도 안되는 현상이었다. 더구나 지금의 의예과 문화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듣고 있어 안타까운 느낌도 든다.

예과 노래처럼 본과는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 더 가혹한 시련의 기간이었다. 그 후 계속된 전공의 시절을 포함한 의사생활 또한 녹록한 시간이 아니었다. 정말 쉴 수 있는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예과 때 노래했던 대로 앞으로 놀지 못할 테니 예과 때 놀자고 했던 것은 정말 잘못이었다.

국제학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영어로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영어 논문 작성을 한글 쓰듯이 할 수 있다면 훨씬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의사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 느낀 것을 글로 혹은 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정말 풍요로운 삶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여러 번이다. 독서를 통해서 인격을 함양했더라면 환자와 티격태격하지 않고 좀 더 편안하게 치료해 드렸을 거라고 생각한 때도 부지기수다.
사회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정이 넘치던 사람 사이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예과 교육이 의사가 되기 위한 사람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필요한 때인 것 같다. 후회해도 소용없고 실현될 수도 없지만 다시 한번 예과 생활이 주어진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아쉽고 또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