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6) 이윤택 - 그녀에게 말 걸지 못한 것


이윤택 | 극작가·연출가

 


현실적인 것들에 관한 한 나는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세상에 몸 섞고 살다 보면 이해되는 것들이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성공이 있고 실패가 뒤따른다. 실패했다고 후회를? 천만의 말씀이다. 실패 또한 삶의 소중한 반쪽이다. 현실적인 것들은 결국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다. 사상이나 느낌 또한 변하고 퇴색한다. 그래서 후회해 본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기억뿐이다. 시간의 흔적 속에 잊혀지지 않고 내 늑골 깊숙이 비밀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 나는 그것을 영혼의 주머니 속에 담겨있는 연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일이다. 나는 생래적으로 운명론자이다. 그래서 인연을 상당히 중요시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문득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요? 묻고 싶은데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타인과 서슴없이 말을 트는 주접도 없어서 그냥 마음만 울렁일 뿐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많다. 한참 지나서야 에이, 그냥 말이라도 걸어 보는 건데 하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럴 경우 후회하는 게 마땅하다. 나는 조금 전에 내 반쪽과 만날 기회를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런 경우 ‘해후(邂逅)’란 개념을 사용한다. 전혀 만난 적이 없는 타인과 마주쳤을 때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면 그게 바로 내 사랑이다.

 

연출가 이윤택 ㅣ 출처:경향DB

 

내 의식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마주쳤던 여인들은 많다. 나의 탄생을 지켜본 병원 간호사의 눈길, 젖꼭지를 물었던 최초의 감촉, 함께 뛰놀았던 예닐곱 살 시절의 여자친구, 빨래를 널고 있던 이웃집 젊은 새댁의 육감적인 몸의 라인까지 겹쳐져서 어느새 내 무의식 속에 한 여인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 여인과 현실적으로 딱 마주친 것이다. 그녀야말로 내 영혼의 주머니 속에 담겨있던 순도 백프로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나는 열일곱 살 적에 그런 여성을 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순간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알 수 없는 화염에 휩싸였고, 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 담벼락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주저앉아서 이게 무어야? 이게 무슨 감정이지? 그렇게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성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증명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영역이며 절대 순수의 사랑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란 게 이런 것인가.

 

그러나 그런 절대 순수의 대상은 또 왜 그렇게 현실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 여학생이 사는 집 대문 앞을 수백번 왔다 갔다 하면서도 차마 대문을 두드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이 다 지나갈 즈음 내게 기적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입시를 한 달 앞두고 아예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죽치고 있었다. 그때 꿈인 듯 생시인 듯 그 여학생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조화지? 나는 무심결에 그녀를 보는 순간 또 한번 알 수 없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만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저 여자가 여기 왜 왔지? 왜 지금 내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어떡해야 하나? 분명히 내가 자기가 좋아서 죽고 못 산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다. 그래서 지금 제 발로 나타난 거다. 아니 어떤 미친 녀석이 일러바친 거지? 젠장 친구에게 털어놓은 내 방정맞은 주둥이가 문제였다. 나는 계속 혼자 주절거리면서 끝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말을 걸기는커녕 제대로 눈길 한번 마주치지도 못한 채 그녀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지금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그때 그 순간을 되새기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후회가 된다. 그래도 내 첫사랑인데 어떻게 말 한번 걸어보지도 못한 채 그냥 흐르는 시간 속에 떠나보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또 왜 그날의 짧은 순간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바로 옆자리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광채, 온기 같은 것이 지금까지 내 삶의 신비스러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내 삶은 그 어이없는 후회를 만회하기 위한 질주였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녀를 찾아가리라. 그러나 내가 나인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살아왔는데 삶은 갈수록 내 꿈과는 무관하게 흘렀다. 그래서 지금도 그 후회를 만회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 후회는 내 무덤 속에 같이 묻힐 것이다. 그 후회야말로 내가 살아 갈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힘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