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읍 | 뮤지컬배우
배우를 ‘딴따라’라고 하던 1970년대 후반, 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세종문화회관 소속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립뮤지컬단)에 입단했다.
고등학교 때는 성악과 진학을 꿈꾸었지만 가정 형편상 레슨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결국 포기했다. 책 외판원과 신문팔이, 채소와 과일 리어카 행상을 하면서 겨우 학비를 마련해 재수를 했다.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산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 연출가의 제안으로 연극을 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대학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연극과 선배들 중에서도 연기보다 피아노 앞에서 매일 노래 연습만 하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면서 ‘뮤지컬’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그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대학 자체적으로 무대에 올린 뮤지컬 <가스펠>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의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당시 대한민국에 하나뿐이던 뮤지컬 단체 ‘서울시립가무단’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학교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입단 시험에 필요한 시창(악보 보고 바로 노래 부르기), 가창, 연기, 무용 등을 공부하는데 쏟아부었다.
뮤지컬배우 남경읍
학교 도착시간은 매일 새벽 5시30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개인 연습 스케줄에 맞춰서 발성, 체력 연습, 탈춤, 기계체조, 피아노 연습, 발레, 모던발레, 재즈, 한국무용, 연기과제, 리포트 쓰기 등을 소화해냈다.
날이 밝아오면 6층 건물인 극장 옥상에 올라갔다. 눈이나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난간에 올라서서 걷기나 조깅을 날마다 반복했다. 떨어지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담력과 집중력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한 것 같다. 덕분에 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시립가무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가무단에 입단했지만 나의 상품가치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새로운 마음으로 배우수업을 임했다. 5시30분 연습실 도착, 밤 11시에 퇴실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20대 초중반의 ‘나 홀로 연습실에서!’는 꽃놀이, 당구치기, 연애하기, 술 마시며 친구들하고 놀기 등 항상 무언가의 유혹을 받았다.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쓰디쓴 ‘마이신’ 가루를 샘플병에 담아서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한 병씩 마셨다. 저녁 9시30분 자동으로 연습실 전기가 끊어지면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대본과 악보를 보며 연습을 거듭했다. ‘형설지공’을 떠올리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던 시간이었다.
연습량에 항상 자신감이 있던 터라 어느 순간 나는 자만에 빠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뼈아팠다. 내 인생에서 평생 후회로 남은 큰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작품에 출연할 때는 노래 연습을 열심히 했으나 작품이 없는 기간 개인 연습 시간에는 노래 연습 시간의 비중을 많이 두지 않았다. “노래는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자만의 결과였다.
얼마 후 서울시립가무단의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주역을 운 좋게 맡았지만 4개월간의 연습 기간 내내 연출자로부터 혹독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노래소리가 곡하는 것 같다”라거나 “배우할 생각 접고 차라리 어머니의 뒤를 이어 생선이나 팔아라” 등의 모욕적인 말을 쉼 없이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때는 억울한 마음만 들었다. 당시 연출자의 말이 진심임을 깨닫고 내가 좀 더 겸손한 마음으로 노래 연습에 더 매진했다면 오늘날 노래 잘하는 뮤지컬계 젊은 후배들과 견줘도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됐을 텐데….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씨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예술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다짐을 한다. “남경읍,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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