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미니픽션] 굿나잇, 웨스트엔드


비가 퍼붓다 그친 차이나타운 거리로 다시 나왔을 때, 우리 중 반 정도는 엉망으로 취해있었다.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제법 마시기도 했거니와, 모인 시간에 비해 너무 빨리 마신 것도 그 이유였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지금 와서 기억나는 것은 오직 목을 알싸하게 그으며 내려가는 술기운뿐이니까.
  

어쨌든 빗물인지 구정물인지 모를 검은 물들이 찰랑거리는 그 거리에서, 누군가 2차는 코리안 타운으로! 라고 외쳤고 몇몇 목소리들이 동조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32가에 있는 일명 K타운은 이 시간쯤이면 맨해튼 각지에서 1차를 마치고 2차를 하기 위해 몰려온 한인들로 북적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둘 택시를 잡아 거기서 봐! 라며 헤어지기 시작했고 나 또한 마지막까지 남은 무리들 틈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현듯 라리사를 떠올린 것은, 마지막 옐로우 캡이 도착한 순간이었다.
 

라리사. 덴마크에서 온 금발의 아가씨. 어학원 종강파티랍시고 클래스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한인끼리 모여 이렇게 술을 퍼마시고 있으면서도, 사실 마음은 계속 딴 곳에 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전형적인 금발 미녀는 아니었지만, 환한 미소와 친절한 말씨로 내게 말을 걸어주던 그녀. 몸을 조금씩 움직이거나 자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그녀에게선 맨해튼의 악취도 어쩔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만나는 것이 수업에 나가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마침내 오늘,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한 마디씩 감회를 이야기하는 시간, 나는 틀이 박힌 소감 대신 이 한 마디를 말하고 싶었다. I think I love you, Larissa.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나는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시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행복했다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소리를 늘어놓고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라리사의 뒷모습만 황망히 바라보다 친구들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평소와 달리 술을 과하게 마신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터번을 둘러쓴 택시 기사가 마지막으로 남은 네 명 앞에 멈추어 섰을 때, 나는 잽싸게 앞자리로 올라타면서 친구들을 향해 미안해! 라고 외쳤다.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얼른 출발하라고 재촉하자 기사는 인상을 한 번 찌푸리더니 거칠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멀어져가는 백미러로 소리 지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웨스트엔드, 원 오 세컨 스트릿.”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주소를 읽어주자 기사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기 초에 나눠가진 연락처 리스트를 아직까지 갖고 있는 사람은 아마 나 뿐일 것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기사는 다운타운을 빠져나갈 무렵 걸려온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입을 열더니, 그때부터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본업은 택시 기사가 아니라 통신 판매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첼시마켓을 지나 미드타운에 들어서자 차가 속력을 냈다. 한쪽에 전화기를 붙들고 운전하는 폼이 영 못미더웠지만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나는 라리사에게 할 말을 생각해내야 했다. 뜬금없이 이 밤중에 왜 찾아왔다고 해야 하지? 첫 인사는? 좋아했다는, 아니 좋아한다는 말도 해야 할까?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 두서없는 생각들이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불빛들처럼 머릿속에서 흩날렸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을 영어로 말해야 하다니. 그간 학원에서 배운 게 뭔가 싶어 허탈했다.

  
스트릿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내 마음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로켓처럼 타들어갔다. 몽롱했던 정신은 긴장감 때문인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수업시간보다 더 열심히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떨어지면 불구덩이에 빠지는 시험을 보기 직전인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택시는 70가, 80가, 90가를 차례로 지나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나는 채 다 만들어지지 않은 영어 문장들을 중얼거리며 주머니에 있던 마지막 20불짜리를 통화 중인 기사에게 건넸다.

  
마침내 택시에서 내려 찬 기운을 확 들이마시는 순간, 나는 술이 완전히 깨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하니 서서 그녀가 살고 있다는 건물을 올려다보니 대부분의 창엔 불이 꺼져 있었다. 저 중 그녀의 창은 뭘까. 밖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자고 있는 걸까. 그러는 사이 아까 애써 만들어낸 영어 문장과 단어들이 길 잃은 새끼 고양이들처럼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녔다. 나는 건물 입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가, 두 걸음 물러서기를 서너 번쯤 반복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애꿎은 시간만 확인하다, 끝내 나는 전화기를 열어 그녀에게 전화 대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결국 그녀에게 보낸 문자는 단 두 단어였다. Good Night. 핸드폰을 닫고 지갑을 뒤져보니 들어있는 것은 1불짜리 지폐 두 장. 지하철도 버스도 탈 수 없는 지폐 두 장을 다시 지갑에 구겨 넣고 나는 뒤돌아 저 멀리 코리안 타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기 오래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