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변두리와 불안

‘문단의 말석’이라는 오래된 관용어구가 있다. 문단이 품계석처럼 지위 고하에 따라 자리를 나누는 마당은 아니지만 말석이란 갓 등단한 신인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겸양일 수밖에 없는 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문단에 한 ‘자리’를 얻었다는 말이니, 어쨌든 한자리를 차지하기는 했다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겸손하게 작은 자리 하나 얻었다는 의미로 말석으로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등단은 시작에 불과하니 말이다.

 

흥미롭게도 서양에서도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지위(status)라고 부른다. 이 지위도 어떤 표지판 앞에 서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다(sta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어딘가에 서는 것, 그게 바로 지위이고, 지위란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갖는 게 또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 낮은 지위라며 지위의 고하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회의 세세한 면에 따라 그 조건은 달라질 수 있지만 지위에 높고 낮은 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속된 말로, 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런 의미에서, 자리로 인해 존엄성에 위협을 받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질투로 고통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혹시나 우리가 사다리의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더 낮은 단으로 떨어질까봐 두려워한단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는 이런 걱정이 매우 독성이 강하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건 무척 상대적인 것이라서 스스로의 지위에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타인과의 비교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작게 느끼고 불편해한다. 그게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그렇다고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기도 애매한 청춘을 보여준다. 청춘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학수’(박정민)는 래퍼 오디션에 6번째 참가 중인 래퍼 지망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홍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팬까지 거느린 래퍼이지만 그 정도 자리는 아직 부족하다고 여긴다. 더 어렸을 땐, 홍대 무대에 서기만 해도 자신의 불안이 해소될 것 같았겠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는 홍대 무대가 오히려 현실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무대에선 강력한 래퍼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변산만 떠나면 훨씬 덜 불안하고 나아질 것 같았지만, 서울에 사니 이번엔 또 강남에 사냐 강북에 사냐 고향 친구들이 따져 묻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변산>을 보면서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랩을 대하는 청춘의 자세이다. 최근 강의실에서는 노트를 펼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학생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그런 학생들 중 많은 수가 직접 랩 가사를 쓰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왜 시를 안 쓰고, 랩 가사를 쓰지라며 조금은 의아해했는데,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변산>이 보여준 셈이다. 요즘 20대에게는 랩이 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랩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심장 박동에 맞춰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수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골 출신 학수는 금의환향에 대한 꿈을 고백한다. 금의환향이란 우리가 앞서 말했던 불안의 증상 중 하나이다. 적어도 고향에 돌아갈 땐, 떠날 때보다는 더 성공해서, 출세해서, 부자가 되어서, 멋지게 돌아가고 싶은 것, 그게 바로 금의환향이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금의환향의 세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소위 세속적인 성공이 전부이다. 돈, 명예, 권력이 성공의 열쇠이며 그것이 곧 존재의 불안을 다스려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명함이 곧 평가 기준이 되는 속물의 세상에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자리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결국 훨씬 더 많이 가진 상태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유아적 바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집에 오랜만에 놀러갔을 때, 우리 외손주 왔냐면서 가장 편한 자리를 내주고, 가장 귀한 음식을 먹여주며, 뭐든 해도 된다고 허락받을 때 느끼는 그런 존재감처럼, 세상에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런 허약하고, 연약한 사람의 내면을 이용해, VIP, VVIP의 스티커를 붙여 가치 있는 사람의 속성을 더욱 속물화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존중받을 만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의 수위를 얕게 함으로써 그럴듯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뭣이 중헌지를 모르는 채로,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된다.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위에 연연하던 학수는 결국 고향 땅에서 다른 성공을 거둔다. 알고 보니 금의환향은 꼭 돈을 벌고, 시험에 합격하고, 일등을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사람 사는 가치라는 게 결코 자리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향의 품에 안긴다. 사람의 한 가지 면모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으로 평가하려는 사람, 알랭 드 보통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속물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스스로 지위를 높이고자 애를 써도, 남을 지위로 평가하는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을 무턱대고 동경하거나 경멸한다고 해서, 불안이 해소될 리는 없다. 불안은 결국 다양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사랑할 때, 서서히 사라질 불편이 아닐까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