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봄의 맛이 오는 소리

한때 바지락보다 싸고 흔해서 서해안에서 칼국수를 시키면 동죽 반 국수 반이었다. 어인 일인지 관리가 잘되는 바지락은 여전한데 동죽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흔히 제철이니 뭐니 하는데 그건 곧 사람의 몸은 우주의 운행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입이 깔깔하고 입맛 당기는 게 있으면 대개 제철 음식에 대한 갈망이다. 묘한 일이다. 영양 과잉의 시대라지만, 봄에는 봄을 먹어야 한다.

동죽이며 조개가 한껏 맛이 오른다. 조갯국 한 사발로 겨울을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 좋은 조개는 역시 산지에 가야 한다. 서해안이 제격일 텐데, 그 동네 재래시장의 밥집은 흔하게 손님이 장봐온 재료로도 요리를 해주곤 한다. 물론 약간의 협상이 필요하다. 조개를 한 바가지 사서 가보라. 영양을 듬뿍 안은 조개는 끓여내면 진액 같은 걸 뿜어낸다. 독을 싹 없애줄 것 같은 기대감을 준다. 무엇보다 그 진액은 감칠맛이 응축되어 있다. 그 서해안의 명물이 봄 실치다. 흔히 뱅어포를 만드는 것인데, 실은 실치라고 하고, 배도라치의 치어라고 한다. 장고항은 자그마한 항구인데, 사철 좋은 해물을 구할 수 있지만 실치 때문에 유명해졌다. 살아서 꼬물거리는 실치를 보고 있으면 감히 우주의 법칙을 생각하게 된다. 장고항 밖으로는 해풍이 불어오는데 따스운 봄바람을 절감할 그런 바람이다.

쑥이 남도에서 이미 오고 있다. 남쪽의 훈풍은 무엇이든 일찍 기른다. 쑥은 원래 들머리나 산기슭에서 캐곤 했지만, 이제는 밭에서 생산을 많이 한다. 쑥도 작물이다. 그러거나 맛은 좋다. 도다리쑥국이라고 흔히 남쪽 해안가의 명물이 언젠가부터 도시의 식당에서 너도나도 파는데, 실은 도다리가 아니어도 좋은 맛이 난다. 도다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쑥이 먼저인 까닭이다. 연한 쑥 서너 줌에 어떤 생선이든 맛있다. 요새 간혹 잡히는 연한 오징어, 전갱이, 아니면 양식한 광어새끼도 좋다. 쑥이 들어간 생선국은 맛이 좋게 마련이다. 남쪽 방식으로 맑은탕이 많은데, 된장을 풀어도 맛있다. 보증한다. 마늘은 조금, 파도 적당히. 오직 쑥의 힘을 믿으면 되는 국이다. 소금은 간간하게. 묵은 겨울 체증이 씻겨 내려간다.

미더덕과 멍게는 형제인데 미더덕이 먼저 철이 온다. 역시 형제인 오만둥이는 가을이 철이다. 미더덕은 까는 수고가 어려워서 값이 좀 나간다. 손으로 일일이 작업해야 해서 양도 적다. 그래도 미더덕의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면 봄이다. 미더덕이 없더라도 서운해 하지 말기를. 이른 철의 멍게는 향이 옅어서 미더덕처럼 은근하다. 멍게를 듬뿍 얹어서 물냉이와 미나리를 많이 넣고 덮밥을 해먹으리라.

미나리도 제철이다. 요새는 촉성재배가 활발해서 철이 당겨지고 있지만, 봄의 미나리는 연하고 아삭하며 기운을 준다. 대구를 경계로 청도와 영천 일대의 경상도 지역에는 유명한 한재미나리를 비롯해서 좋은 미나리가 많다. 차를 몰아서 미나리와 삼겹살을 즐기는 것이 요즘의 유행이다. 나는 묵은 된장과 함께 미나리쌈을 먹고 싶다. 입이 미어지게.

또 살아내야 할 봄이 되었다. 오래전에 그랬듯이. 어찌 또 살게 될 것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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