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프로야구 따위…

 

단순한 공놀이로 구경할 때 야구만큼 복잡하고 지루한 스포츠가 없다. 야구를 재밌게 관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참여해야 한다. 특정 구단에 자아를 투사하는 팬이 되면 좋다. 그 팀이 곧 나이기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경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즐길 수 있다. 승패에 따라 환호하고 탄식하며 감정을 소비한다. 야구가 허구보다 매력적일 때다.

나는 야구와 영화를 좋아하지만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는 거른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야구는 이야기의 풍경일 뿐, 보통 영웅적 주인공이 고투 끝에 승리하며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재미가 덜하다. 덴절 워싱턴(사진)과 비올라 데이비스가 주연한 <펜스 2017>은 1950년대 피츠버그를 배경으로 완고한 흑인 가장과 가족 간의 반목을 다룬 드라마다. 캐치볼 한 장면 나오지 않지만 가장의 피해의식이자 현실인식이 야구에서 비롯되었고, 흑인에 대한 차별과 불공정의 폐해를 입체적으로 노출한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어린 나이에 가출한 주인공은 비행마저 서슴지 않으며 아등바등 살아왔다. 우연히 야구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흑인에게 때가 아니었다. 절망한 남자는 자신의 펜스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투 스트라이크에서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 비유한다. 한 번의 스윙 기회만 주어진 기울어진 운동장 내의 게임. 시원하게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꿈꾸며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두를까? 어림없다. 남자에게는 부양할 가족이 있다. 어떻게든 1루에 진출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번트였다. 번트는 볼품도 없지만 죽도록 달려야 겨우 살 수 있다. 장타를 칠 기회가 없으니 진루하기 위해서는 도루(盜壘)밖에 없다. 말 그대로 2루를 훔쳐야 한다.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잔꾀와 빠른 발로 자신의 가치를 증거해야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다. 고단한 삶이다.

<펜스>는 차별로 기회를 박탈당한 흑인 가장의 좌절된 꿈과 미국의 정의롭지 못한 역사를 표본화한 준수한 영화다. 공정하지 않은 사회의 개인들이 변화에 비관적이고 무기력할수록 스포츠는 인기를 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쌓인 불만을 해소하고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스포츠에 과몰입한다.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 이겼을 때는 대리만족을 얻는다. 의외로 자기 팀이 졌을 때도 스포츠의 효능이 발휘된다. 1위를 구가하고 있는 팀이라도 패하는 날 홈페이지는 원성으로 들끓는다. 경기에서 실수를 저지른 선수와 제때 선수 교체를 하지 않은 감독에게 원색적 비난이 쏟아진다. 차분한 위로와 격려글은 무시되는 반면 급하게 써진 과격한 질타글은 조회수가 높다. 불평등한 기회 제공의 억울함, 한 번의 실수로 낙오할 수 있는 불안한 사회에 순응하는 개인은 스포츠를 통해 분풀이를 한다. 게시판은 희생양을 통해 감정의 정화를 담당하는 제단이다. 슬프지만 이렇게라도 답답함을 풀 데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대표적 인기 스포츠다. 언제부턴가 선수와 감독에게 쏟아지던 비난의 관행이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불공정한 운영에 대한 불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KBO는 문제 발생 시 게으른 대처와 재발 방지 의지 박약으로 팬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심판과 선수의 승부조작 등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단의 이익 앞에 원칙은 뒷전이었다. 결국 올 시즌 두 구단 선수들이 술판을 벌이다 코로나에 감염돼 리그가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중단 결정에 KBO 총재가 나서 특정 팀에 유리하게 거들었다는 의혹이 가세했다. 예의 KBO는 석연치 않은 반박문을 배포했지만 많은 팬들이 조용히 리그를 떠나고 있다. 불공정하게 운영되는 리그의 스포츠는 단순한 공놀이가 아니라 불순한 공놀이, 긴장 없는 서커스일 뿐이다. KBO는 현재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길 바란다. 불안하게도 총재를 맡았던 한 분의 냉소적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프로야구 따위….”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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