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토요일) 저녁, 뉴욕에서 출장 온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 마침 세일기간이라 백화점 주변
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다. 참고로 친구는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라는
곳에서 다양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www.koreasociety.org) 보통은 전시 준비 차
1년에 한번 정도 혼자 한국을 방문하곤
하는데, 이번엔 다른 직원과 함께였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는 젊은 직원은 이번이 첫 한국방문이라고. 건축 학도답게 한옥을 보고싶어 해서 아쉬운 대로 한옥으로 된 식당에 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 후 행선지는 인사동. 이젠 고궁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된 한옥 구경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더구나 인사동 역시 '전통문화의
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온갖 종류의 짝퉁이 넘쳐나는 지라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서울은 추억이 머물기에 적당한 도시가 아닌 듯하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모두
부지부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추억들도 속절없이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어찌보면 그게 인생의 순리겠지만, 자연스럽게
나이듦을 참지 못하고 쉽게 고치고 때려 부수고 밀어내 버리는 데에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민다. 갑자기 소중한 것을 강탈당한
느낌이랄까. 청진동과 피맛골이 사라진 낯선 풍경 앞에서 그 상실감과 무력감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면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될까. 아, 어쩌다 이렇게 매정한 도시가 됐는지.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 겨우 신세계백화점 언저리까지 왔다. 신호에 걸려 한참을 서 있다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아려온다. 오늘 아침 창졸간에 접한 박완서 선생님의 부음 탓이다. 어떤 특정한 공간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과 그에 따른 감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이곳 - 신세계 본점 앞은 언제나 꿈결같이 아득하고 애련한 우수가 감도는 곳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분수대를 중심으로 서양식 근대 건축물인 신세계와 한국은행이 마주하고, 명동과 을지로 입구, 소공동, 남대문시장으로 가는 길이 방사선으로 뻗어있다. 그리고 그 길, 후미진 골목마다 옛 영화를 간직한 오래된 노포(老鋪)들이 포진해 있다.
“지금 바로 옆에 보이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은 1930년에 세워진 건물이에요. 서울에서는 아주 오래된 건물에 속하죠. 원래는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이자. 최초의 백화점으로 세워진
건물이에요. 광복 후에는 미군의
PX건물로 사용되기도
했구요. 사실 오늘 아침에 박완서라는 유명한 소설가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바로 그분이 당시에 이곳에서
일하셨답니다.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 주문을 받는 일종의
‘삐끼’ 역할이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시 그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 중에 한국의
‘국민
화가’라고 불리는 박수근 씨도 있었다는
거예요. 두 사람 모두 전쟁통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PX에서 일하게 됐던 거죠. 이 운명적인 만남을
쓴 소설이 박완서 선생님의 데뷔작
『나목』이에요. 박수근 화백이 즐겨 그리던 소재도 바로
‘나목’이었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분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 몰라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랍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젊은 직원이 아주 흥미있어 한다. 정말 전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두 사람이
있었을까.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미군의
PX라는 낯선 곳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전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대학 신입생으로 빛나는 청춘을 보냈을
터이고,
또 한 사람은 화단의 중견화가로서 화업에 매진했을 테니까
말이다.
PX 초상화부 작업 장면. 왼쪽이 도예가 황종례, 한 사람 건너 박수근이 보인다. 1952-54년경.
위 사진 · 구글에서 업어온 사진. 6.25직후 미군 PX건물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색 테두리의 PX간판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나목』을 읽은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의 몇
장면 - 특히 퇴근길에 두 사람이 을지로입구 전차역까지
함께 걷거나 명동의 노점상에서 움직이는 인형을 구경하는 장면 등은 마치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인양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래서 가끔
을지로입구나 명동을 걸을 때면 『나목』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곤
한다. 더구나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입구
쪽에는 언제나 움직이는 인형을 파는 노점상이 있어서,
두 사람이 인형을 구경하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 아닐까 혼자 생각하곤 한다.
어렸을 땐 나도 이런게 참 재밌고 신기했는데 말이쥐...-.-;;
오래된 도시는 사람들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땀과 눈물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지친 도시민들은 따뜻하게 위로받기도
하고 다시금 힘을 내기도 한다.
진짜 디자인이 잘된 도시는 이렇게 무형의 깊이를
간직한,
정서적으로 안정된 도시가
아닐까.
내게 신세계 앞은 바로 그런
곳이다.
방사선으로 난 길마다 수많은 추억들이
녹아있고,
그 길을 걸으며 나는 꿈을 꾸고 힘을
얻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시를 추억한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어느
도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책장을
뒤져보았다. 역시, 199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우리의 화가
박수근>의 도록
수록글이다.
옮겨 적기엔 다소 글이 길지만, 그리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인용해
본다.
박수근의 그림을 많이 보여주고 싶지만, 작품
이미지 저작권 탓에 가지고 있는 도록 몇 권을 대신 사진 찍어
올린다.
위·
아래 두 권은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과 그 시대
화가들전>(2004,
왼쪽)과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우리의 화가
박수근전>(1999,
오른쪽)
도록. 위의 것은
1965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65
박수근
유작전>의 출품작
79점 중
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아
2009년 갤러리현대에서 만든 전시
도록이다.
아래·1965년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열린 박수근 화백
유작전 팸플릿을 재현한
것.
6점의 흑백 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
박완서 선생이 직접 쓴 도록 수록글
그는 그 잔혹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냈나
-박완서
나는
1951년
11월경부터
53년 초까지 미군
PX에서 일한 적이
있다. 휴전이 성립되기
전, 전선(戰線)이
38선 근처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할 때라 서울은
포성이 바로 산 너머에서 들리는 듯 지척에서 느껴지는 최전방
도시였다. 민간인의 한강 도강은 금지돼 있어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간 대부분의
시민들이 아직 못 돌아오고 있어서 서울의 인구는 매우
희박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이 그때 미
8군의 메인
PX였다. 쓸 만한 건물은 모조리 파괴된 텅 빈
수도지만 그래도 미군부대 근처는 일자리나 미군물자, 하다못해 흘러나오는 미제 쓰레기라도
얻어걸리려는 남루한 하루살이 인생들이 모여들어서 이른바 기지촌 경기로
흥청거렸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것들엔 쓰레기가 있을
수 없었다. 깡통이나 보루바꼬는
건축자재로,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는
‘꿀꿀이죽’이라는 영양식이 되어 거래가 될
때였다. 그중에서 남대문시장을 낀
PX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화려하고 활기 넘치는
상업지대였다. PX에서 온갖 방법으로 유출된 미제물품과
염색한 군복, 구제품 중에서 쓸 만한 옷가지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지금의 백화점 못지않은 고급상가 구실을 하고
있었다. 또한
딸라장수, 구두닦기, 소매치기, 거지 등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는
우범지대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오빠가 죽고 졸지에 가장이
돼있었다. 어머니와 어린 두 조카를 굶겨죽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대책 없는 가장은 이상한 활기에 이끌려 그 거리를 헤매다 기적처럼 쉽게
PX에 취직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 취직을
‘산 입에 거미줄 치란 법은
없구나’라는 정도로 반겼지만
PX 경기에 대해 어느만큼 아는 이들은 우리
집이 당장 금시발복을 할 것처럼 축하와 시기를 겸해
부러워했다. 나도 꿈의 궁전에 입성하는 것만치나
얼떨떨하고도 황홀했지만 내가 일할 곳은 미제 물건을 파는 매장이 아니라 한국물산을 파는
위탁매장이었다. 처음에는 미싱자수로 무궁화나
용, 공작 따위를 등과 가슴에 수놓은 파자마나
하우스 코오트를 파는 매장에 있다가 곧 초상화부로 보내졌다. 초상화부와 파자마부는 같은 사람이
사장이어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기껏 남들이 부러워하는
PX에 취직한 줄 알았는데 미제물건은 그림에 떡인 한국물산부에 있게 된 것도 억울한데
초상화부라니, 기가 막혔다. 물론 나더러 초상화를 그리라는 건 아니었고 화가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미군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아내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꽁하니 비사교적인 성질인데다 영어도
짧아 초상화부에서 전혀 실적을 올릴 수가 없었다. 파자마를 파는 건 미군이 원하는 물건을
이것저것 보여주고 치수나 물어보고 정가대로 팔면 되지만, 초상화는 그렇지
않았다. 초상화부에 견본으로 진열된 초상화들은 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얼굴이었다. 제 얼굴이나 아버지 얼굴을 그려달라는
미군은 온종일 한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어리숙한 미군을 골라잡아 수작을
걸고 그가 마침내 패스포트를 꺼내 아내나 여자 친구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자랑을 시키도록
만들고, 나는 그 여자들의 미모에 까무라칠 듯이
놀라며 이런 놀라운 미인이 애인이라면 단속을 잘해야 할거다, 그녀만을 사랑한다는 표시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준다면 그녀가 얼마나 감동하겠느냐, 대강 이 정도의 과정을 거쳐야 주문 하나를
맡을 수 있는데, 나처럼 짧은 영어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장이 나를 내쫓으려고 그리로 보낸 것
같은 추측이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다. 전에 있던 종업원이 받아놓은 주문량이 거의
바닥이 날 즈음 사장보다 먼저 화가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거의 삼사십 대의 간판쟁이들은 여러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었고, 나는 월급제였지만 그들은 일한 양에 따라
일주일 단위로 돈을 타갔다. 한 장도 못 그리면 한 푼도 못 받게
돼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그달 월급이나 받고 그만둘
생각으로 죽어도 하기 싫은 출근을 했다. 그러나 그만두면 어떻게 사나 하는 공포감과
내 식구 뿐 아니라 화가들한테 딸린 식구들의 밥줄까지 내 어깨에 달려있다는 책임감이 조금씩 내 말문을 열게
했다.
그 무렵 새로 채용된 화가가 박수근이었다. 52년 어느 날이었다. 사장한테 들은 그의 신상은 월남한 사람이라는 것과 부양해야 할 식구가 많다는 것 정도여서 나는 그가 진짜 화가인줄 모르고 있었다. 이름도 알 필요 없이 그냥 박씨라고 불렀다. 그는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기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닥은 어질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만큼 뻔뻔해지기도 해서 브로큰 잉글리시로나마 미군들과 된 소리 안 된 소리 수작을 걸 수 있게 되어 차츰 그림주문이 늘어나게 되자 나는 화가들에게 방자하게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교만한 마음과 양가집 처녀에다 서울대학생인 내가 기껏 간판쟁이들 먹여 살리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자기모멸이 뒤범벅이 되어 얼마나 싸가지 없이 굴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아버지뻘은 되는 화가들을 김씨, 이씨, 하는 식으로 마구 대했다. 나는 그때 내가 더 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졌다고 여겼고, 그 불행감에 탐닉하는 맛에 살고 있었다.
그때 초상화부에서 미군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품목은 스카프에다 그리는 초상화였다. 사장이 파자마 부를 겸하고 있었으니만치
파자마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재질의 번들번들한 인조견을 우리는 미군들한테
‘사텐’이라고
말했다. 흰 인조 사텐을 스카프 크기로 톱니 가위로
자르고 한 쪽 귀퉁이에다는 꾸불꾸불한 용(龍)을 나염하고 용의 몸통 여기저기다가
문산, 동두천, 김화, 양구 등 당시의 격전지의 지명을 영문으로
집어넣은 기념 스카프는 파자마부에서 1달라
30센트로 꽤 잘 팔리는 인기
상품이었다. 그 스카프의 용의 나염에서 대각선으로 반대
귀퉁이에다 초상화를 그려주면 6달라를
받았다. 위탁매장 매상은 당일로
PX사무실에다 입금시켜야
하고, 일주일 단위로 몇 할을 제하고 나서 우리
돈으로 바꾸어 지급이 됐다. 사장은 거기서 다시 원가 제하고 자기 이익
챙기고 나서 실적에 따라 화가들에게 분배했다. 나는 그림 주문 받는 일 뿐 아니라 그런
회계도 겸했지만 화가들에게 몇 할이 돌아갔는지 그 비율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작업한 양만큼 보수를 받는
그들에게는 많이 그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주문한 미군이 트집 잡지 않고 순순히 찾아가는 것은 더
중요했다. 다시 그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빠꾸 받는다고
했는데, 그림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미군을
달래서 빠꾸받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내 수완에 달렸고, 나도 차츰 그런 요령이 생기면서 더욱
화가들한테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나는 틈만 있으면 그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그들의 그림솜씨를 모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김씨, 사진 좀 똑바로
보고, 머리도 좀 써가면서 그리면
안돼요? 사진보다 조금만 예쁘게 그려주면 입을
헤벌리고 찾아가는 그 어리숙한 쫄병들 비위 하나 못 맞춰요. 이 따위로 그려 놓고도 빠꾸 받으면 뒤로
남 탓이나 하고...” 이런
식이었다. 영락없이 아무런 애정 없이 지진아를
보충수업하는 초등학교 여선생처럼 굴었다.
어느 날 박씨가 두툼한 화집을 한 권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 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끼고 다닌다고 간판쟁이가 화가 될 줄
아남’ 하고 같잖게
여겼다. 그가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고 나에게로
왔다. 화집을 펴들고
있었다. 숙제를 가지고 와서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이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선전(鮮展)에서 특선한
촌부(村婦)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내가 우습게 알고 함부로 대한 간판쟁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었다는 건 나에겐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웠고, 그 동안 열중해 있던 불행감으로부터 깨어나 정신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능멸을 말없이 견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그 화집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한 것일까. 간판쟁이들과 다르게 보임으로써 내 구박을
조금이라도 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그 화집을 보여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잘난 척이라곤 모르는, 간판쟁이들 중에서도 가장 존재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그가 화가라는 걸 밝힌 것은 내가 죽자구나 빠져있던
불행감, 실은 자기도취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가장 그다운 심사숙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입장에만 몰두했던 시선을 돌려 남의 입장도 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생활이 한결 견디기
쉬워졌다. 나만 억울하게 인생의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별의 별 계층의 사람들이 다
섞여있었다. 청소부 중에도 중학교 선생님이 있는가하면 고관의 미망인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에 대한 연민이 그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사는
간판쟁이들,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이 간 내 마음까지 적셔오는
듯했다. 내가 막돼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 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같이 퇴근하는 날도 저녁을 같이
먹거나 그의 집까지 따라가 본 적은 없다. 을지로 입구 전차 정류장까지 같이 걷거나
큰 마음 먹고 명동으로 빠지는 게 고작이었다. 나의 처녀작
『나목』에도 몇 번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명동
노점상에서 장난감을 구경하기를 즐겼다. 지금이야 별의 별 신기한 장난감도 많지만
그때만 해도 태엽을 틀어주면 움직이는 장난감은 PX를 통해 흘러나오는 최신 미제여서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서서 구경을 했다. 태엽만 틀어주면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기도 하고, 신나게 징을 치기도 하는 장난감이 어찌나
재미있고 신기하던지 나는 배창자가 땅기도록 웃었고, 그도 빙그레 웃으면서 장사꾼한테 또 한번
해달라고 간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군밤이나 호콩을 사서 한껏 느리게
까먹으면서 전차 정류장까지 걷기도 하고, 간혹 다방에 들리기도
했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포성이 유난히 가까이 들리는 날은 둘 다
말을 잃고 우울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52년도의 서울은 초연도 채 가시지
않은, 전운(戰雲)이 무겁게 감도는 최전방
도시였다. 포성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로큰 잉글리시로 꼬부라진 혀를
풀고, 그는 이국 여자들의 싸구려 화상을 그리는
노역에서 놓여나 오붓하게 마주 앉아있는, 그 작은 행복과 평화마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으로 가슴이 옥죄곤 했다.
그는 워낙 말수가 적어 말은 주로 나 혼자
맡아서 했는데도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궁금증마저 없었던 건 아니다. 그의 사시장철 변함없는 빛바랜 미군
작업복과, 사장한테 들은 부양가족이 많다는 선입관
때문인지 나는 그의 아내를 무식하고 거칠고, 아이를 쑥쑥 잘 낳는 재주와 바가지 긁는
재주 밖에 없는 끔찍한 여자로 상상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상상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너무도 평범한 그에게 그 정도의 비극적인
장식을 해주고 싶은 게 나의 못말리는 소녀취미였다. 그러나 그를 모델로 한 소설
『나목』에서 나는 그의 아내를 빼어난 이조백자에
비유하리만큼 미화시키고 있다. 『나목』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유작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미모와 교양과 품위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찌나 놀랐던지 먼발치로 바라만
보다가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놀랐을 뿐 아니라 쓰라린 배신감까지 느꼈던
것 같다. 그가 나에게 한번도 그의 부인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 나는 순전히 내 상상력에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만약 내가 부인의 미모와
교양을 진작 알았더라면 절대로 내 소설에서 그분을 그렇게 미화시키진 않았을
걸, 하는 억울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내 멋대로 상상한 추녀 악처에 대한
보상심리가 소설 속에서나마 그녀를 그토록 미화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내 상상과 어긋났던
것은, 사장이 그에게 부양가족이 많다는 얘기를
유난히 강조했기 때문에 적어도 오남매 이상의 자녀가 딸린 줄 알았는데 당시로서는 적은 축에 속하는 삼남매 밖에 안둔
사실이다.
그와 내가 같은 일터에서 일한 것은 일 년
미만이었지만 그동안에는 봄, 여름, 가을도 있었을
텐데, 왠지 그와 같이 걸었던 길가엔 겨울 풍경만
있었던 것처럼 회상된다. 그가 즐겨 그린 나목
때문일까.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내 눈엔 마냥
춥고 헐벗어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 가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그와 그 시대에 대해 증언하고픈 강렬한 욕구가 어느 날
40세의 평범한 주부를 작가로
만들었다. 그런 걸 운명적 만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운명적 만남은 그가 나에게 화집을 펼쳐 보여주는 순간에
왔다. 내 생애에 그런 만남을 경험하게 해주신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직도 좀 있는 것 같다. 안 가지고 있다는 걸 믿고 나면 나의 선견지명이랄까, 안목 없음을 딱하게 여기는 이도 더러 있다. 내가 선견지명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처럼 그림 값 비싼 화가가 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그의 그림을 공짜로 얻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재력은 그의 그림이 쌀 때나 비쌀 때나 그걸 소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때 빠꾸 당한 그의 스카프 초상화를 한 두 장쯤 보관하지 못한 나의 선견지명 없음은 두고두고 아쉽다. 그 조악한 인조 사텐 스카프와 거기 그린 결코 잘 그렸다고 할 수 없는 초상화와, 당시의 격전지 문산, 동두천, 김화, 양구 등 지명이 찍힌 용의 나염은 그 자체가 그 더럽고 혹독한 시대를 화필(畵筆) 하나로 살아남은 예술가의 적나라한 초상이 아니었을까. 남의 나라 전쟁에 투입된 GI들은 그런 지명을 읽을 때마다 ‘갓뎀 문산’, ‘갓뎀 양구’ 하는 식으로 강한 혐오감을 나타냈다. 박수근은 양구 출신이다.
조금만 인용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모두 타이핑 하게 됐다.
거칠고 황량한 시절, 그 아픔과 상처를 온몸으로 견디고 이겨내 예술로 꽃피워 내신 두 분이 문득 너무 그립고 감사하다.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그림으로, 문학으로 남겨 기억하게 해주셔서 너무나 고맙다. 작품 속에서는 모두 헐벗은 나목(裸木)을 그렸지만, 분명 그것은 '희망'을 그린 것이었을 게다. 쓰라린 상실과 아픔을 넘어 다시 새순이 돋고 푸른 잎이 피는 봄을 그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난 칼럼===== > 심정원의 살랑살랑 미술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산책] 겨울방학용 블록버스터 전시 (0) | 2011.02.05 |
---|---|
[오늘의 산책]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 미술의 보고(寶庫) (0) | 2011.01.25 |
[오늘의 산책] 미술과 미식이 있는 북악산 산책길 (0) | 2011.01.12 |
[작가와 작업실] 정현 (0) | 2010.12.30 |
[작가와 작업실] 홍수연 _ 미지의 공간에 대한 탐닉 (0) | 2010.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