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오피스물은 진화한다

MBC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한 장면.

2021년 상반기 드라마 성적표는 꽤 초라하다. <괴물>(JTBC), <빈센조>(tvN) 등을 제외하면 작품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얻어낸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킹덤2>(넷플릭스), <스토브리그>(SBS), <사랑의 불시착>(tvN), <이태원 클라쓰>(JTBC) 등 잇단 수작으로 K드라마의 글로벌 위상이 한층 높아진 지난해와 비교해보면 초라함이 더 두드러진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대작으로 꼽혔던 작품들이 하나같이 기대에 못 미친 탓도 있다. 판타지 사극 <조선구마사>(SBS)는 역사 왜곡 논란으로 초유의 방영 취소 사태를 겪었고, 대작 장르물로 관심을 모았던 <시지프스: the myth>(JTBC), <다크홀>(OCN) 등은 야심 찬 기획의도에 비해 용두사미로 안타까움을 샀다.

 

이런 가운데서도 인상적인 성취를 남긴 분야는 있다. 바로 오피스물이다. 2014년 관습적인 로맨스 플롯을 배제하고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이 장르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미생>(tvN) 이후 오피스 드라마는 노동자 현실에 점점 밀착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진화해왔다. 대형마트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그린 <송곳>(JTBC),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을 주인공으로 한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MBC),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다룬 <청일전자 미쓰리>(tvN)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에도 오피스 드라마의 지평을 더 넓힌 두 편의 수작이 등장했다. 웹드라마 <좋좋소>와 MBC 수목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얘기다. 두 작품은 각각 웹과 지상파라는 플랫폼에 최적화된 대조적 스타일의 드라마이지만, 기존의 오피스물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현실을 집중 조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먼저 <좋좋소>는 중소기업,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 조건을 그린다.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던 29세 청년 조충범(남현우)이 막다른 길목에서 소규모 사업장에 입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영세하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의 보호 범위로부터 벗어난 곳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업무 과잉, 인권 탄압 같은 문제를 날카롭게 묘사한 <좋좋소>는 <미생>마저 판타지로 느껴질 만큼 극사실주의가 빛나는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드라마 연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작진이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 오히려 정형화된 관습에서 벗어난 생생한 이야기를 가능케 했다. <미생>이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냈듯, <좋좋소>는 더 암울한 노동 사각지대에 대한 관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방영 중인 <미치지 않고서야>는 지상파 특유의 정통드라마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관습에서 벗어난 신선한 관점이 돋보인다. 기존의 오피스물에서 주인공들의 악덕 상사 아니면 멘토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던 중년의 중간관리자들을 중심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주인공 최반석(정재영)은 20년 경력의 개발자다.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는 아니어도, 성실하고 꼼꼼한 업무 처리로 굵직한 성과도 남겼다. 하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 승진은 요원해 보이고, 하나둘씩 퇴사하는 선배들을 지켜보면서 불안감은 날로 커진다. 때마침 회사는 경영위기를 내세워 반석이 속한 사업부를 해체하고 그를 경력과 전혀 무관한 인사팀으로 발령한다.

 

이제 반석의 유일한 생존 전략은 회사에서 쫓겨나기 전에 이력서에 성과 한 줄이나마 더해 이직의 길이라도 모색하는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 당자영(문소리)도 위기에 처해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핵심 인재’이지만, 철저한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자주 한계에 부딪힌다. 사내 유일의 여성 임원을 꿈꿀 만큼 야망에 차 있으면서도, 늘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있는 이유다.

 

<미치지 않고서야>가 그리는 중년 직장인들의 애환은 우리 시대 노동계의 새로운 화두로 다가온 정년 연장 문제를 새삼 환기한다.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까지 내다보는 시점이지만, 실제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평균 퇴직 연령은 49세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좋좋소>가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 노동자의 고용 불안을 이야기할 때, <미치지 않고서야>는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여도 마찬가지의 위기에 처한 중년 직장인들의 애환을 이야기한다. 오피스물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두 작품 모두 상반기 드라마 최고의 성취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