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드라마 속 ‘종말 서사’가 던지는 질문

OCN 드라마 <다크홀>의 한 장면.

최근 드라마계에서는 종말의 상상력이 지배하는 장르물이 인기다. 대표적 사례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좀비 재난물 <킹덤>과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장악한 세상을 그린 크리처물 <스위트홈>(이상 넷플릭스)이다. 시대적 배경과 괴물의 양상만 다를 뿐, 세상의 파국을 묘사한 아포칼립스물에 속하는 두 작품의 성공은 유사한 키워드를 담은 장르물의 유행을 이끌어냈다. 저주의 능력을 소재로 한 <방법>(tvN)이나 빙의를 소재로 한 <경이로운 소문>(OCN)과 같은 초자연적 괴물들이 출몰하는 오컬트물에도 종말의 상상력이 녹아들어가 있다.

 

올해 이 같은 유행을 이어가려 했던 조선판 크리처물 <조선구마사>(SBS)가 조기 종영 사태를 맞으면서 흐름이 끊기나 싶더니, 지난달부터 <다크홀>(OCN)이라는 또 하나의 크리처 아포칼립스물이 방영을 시작했다. <다크홀>은 기이한 싱크홀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사람들을 둘러싸면서 이상 증세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연기를 들이마신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와 공포에 지배당한 채 타인을 잔혹하게 공격하게 된다. 드라마는 이 변종인간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지옥이 된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다.

 

<킹덤>에서 <다크홀>까지, 종말의 서사 유행 배경에는 일차적으로 새로운 극적 소재에 대한 요구가 자리하고 있다. 서구적인 장르물이라 여겼던 좀비 재난물을 조선 시대 사극의 틀에 이식한 <킹덤>의 세계적 성공이 한국 장르물의 새 지평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좀비물보다 더 낯선 장르였던 크리처물을 친숙한 아파트의 세계로 옮겨온 <스위트홈>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의 흥행에 힘입어 좀비 재난물에 퇴마물까지 더한 <조선구마사>나 범죄스릴러 수사물에 크리처물을 결합한 <다크홀>과 같은 복합장르물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볼거리에 대한 요구보다 더 근본적인 배경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이 작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의 확산, 환경재난 등 긴급한 문제로 다가온 전 지구적 위기와 불안이 종말의 서사에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앞서 미국에서 9·11 테러의 충격이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의 유행에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국내에서도 비로소 드라마가 시대적 불안을 더 적극적으로 끌어안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최근 종말의 서사에서 주목할 점은 공통적으로 한국에서 제일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그늘이 드리워 있다는 점이다. 바로 혐오와 차별의 폭력이다. 가령 <킹덤>에서 가장 통렬한 장면 중 하나는 죽은 뒤에도 신분에 따라 차별대우를 받는 시신들의 모습이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보호받는 양반들의 시신과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헐벗은 채 버려진 백성들의 대조적 모습은 <킹덤>이 비판하고자 하는 괴물이 다름 아닌 신분의 뚜렷한 장벽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스위트홈>에서는 ‘괴물화’가 진행되는 인간을 격리시켜 괴물과 싸울 희생물로 내세우는 비감염자들의 모습이 더 공포스럽게 그려졌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가 갈수록 심화되는 코로나19 시대에 등장한 <다크홀>에서 이 같은 차별의 코드가 더 두드러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검은 연기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조종하는 무속인은 고용자에게 학대받던 외국인 노동자를 포섭해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 외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유일한 보호자였던 엄마를 잃은 어린이,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소녀 등이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된다.

 

요컨대 요즘 종말의 서사들은 취약계층에게 더 가혹한 위기의 사회에 대한 절망과 우울을 반영한다. 물론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아포칼립스물의 근본적 의의는 기존 세계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데 있다. 불합리한 사회시스템이 붕괴된 세상은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 폐허 앞에서 인간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종말의 서사들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