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요구르트 한 병

-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87년 대선 즈음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왔다. 군 부재자투표를 했다. 나는 앞길이 캄캄한 일병이었다. 부대에서는 선거 한 달 전부터 연일 정신교육을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막사에 중대 병력을 때려 넣고 중대장이며 장교들이 훈시를 했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다. “나 죽는 거 보려면 맘대로 찍어!” 읍소에 가까운 협박도 했다. 그들도 불쌍했다. 노태우 안 찍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중대원 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김영삼 찍을 깁니다.” 부산 출신 상병이었다. 그는 그대로 ‘격리’되었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유하며 얼렀다. 너 때문에 다른 애들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사단장님 특별 관심사항인 거 몰라? 그도 결국 굴복했다. 투표날이 왔다. 중대장실에 한 명씩 병사들을 불러올렸다. 인사계가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1번 노태우 후보 찍는 난만 접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 머리가 돌아갔다. 혹시라도 돌발적으로 2, 3번 후보를 찍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공개투표에 완전 엉터리 투표였다. 그렇게 1번을 꾹 누르고 수치심에 떠는 병사들에게 인사계는 ‘요구르트’ 한 병씩을 돌렸다. 돈 100원 하는 그 싼 음료가 표를 팔아치운 대가였다. 그것도 아마 병사들 후생에 쓰라고 나온 운영비로 산 것이겠지. 나는 그 후로 죄 없는 유산균 발효유가 보기 싫어졌다. 알토란 같은 군대 60만표가 노태우 후보 쪽에 갔다. 빵 한 쪼가리 제 손으로 사주지도 않고 말이다. 소문도 돌았다. 어떤 부대에서는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사전검열로 걸러내어 아예 버렸다고 한다. 사단장의 “100프로 1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의 표를 더럽고 추악한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는 아시는 바대로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그날 대대장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위대한 보통사람’의 당선을 밤새 축하하느라 폭음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투표에 양심을 팔아먹은 적이 한번 더 있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때인가 그랬다. 전두환은 민주세력의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려는 의도로 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 호헌 조치에 잇따라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호헌이냐 아니냐. 모든 장병의 가슴에 ‘호헌 찬성’ 리본을 달게 했다. 군인인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의 사병(私兵)인지 모를 시대였다. 역시 엄청난 정신교육을 퍼부었다. 총 쏘고 야전훈련할 병사들을 올스톱시키고 막사에서 치러진 강요였다. 그때 빵이 나왔다. 봉황 두 마리와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봉건시대도 아니고, 제 주머니 털어 사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하사(下賜)인가 하고 기분 나빠했던 기억도 있다. 하긴 그는 29만원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때도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세금 헐어서 사줬겠지.

 

대선이 코앞이다. 이제 그런 강요는 군대에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군시절의 선거는 참혹한 양심의 위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누굴 찍든 사람은 한 표의 민주적 권리를 자유의지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 이 단순한 권리가 짓밟혔던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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