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창작의 미래]‘NFT’와 과시적 소비

NFT는 성공할까, 실패할까? 나는 성공을 바라는 쪽이다. 물론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먹고살 걱정에 여러 책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은 책은 <콘텐츠의 미래>였다. 미래의 창작자는 일단 작품 판매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작가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 광고를 붙이건 강연을 하건 제 살길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옳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다. 창작물을 팔아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NFT 소식을 접하고 나는 놀랐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작품 판매시장이 디지털 시대에도 가능하다니, 창작자로서 반갑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NFT 시장에서 사고파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작품일까? 적지 않은 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디지털 작품은 많은 돈을 들여 사도 의미가 없다. 무한정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고파는 것은 무엇일까? 토큰이다.

 

작품과 달리 이 토큰은 기술적으로 복제가 불가능하다(‘대체 불가능한 토큰’의 영어 약자가 NFT다). 토큰을 가졌다는 것은 작품을 소유한다는 뜻일까? 사고파는 당사자는 그렇다고 생각할 터이다. 하지만 남들 생각도 그럴까? NFT의 미래는 아직 모른다. 토큰이 장차 집문서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집문서는 종이조각에 불과하지만 이 종이를 가져야 집주인 인정을 받으니 쓸모가 대단하다. 반대로 남한에서 발행한 이북 5도 도지사의 임명장처럼 실용성 없는 물건이 될 수도 있다.

NFT의 쓸모라는 대목에서, 나는 소스타인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베블런은 돈 많은 사람이 실용성 없는 불편한 옷에 돈을 쓰는 이유는 일하지 않아도 먹고산다는 사실을 뽐내기 위해서라고 비꼬았다. 이 이론을 NFT에 적용하면 어떨까? 실용적인 쓸모가 없어도 (어쩌면 그 때문에) 비싼 값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NFT 시장의 성패는 실용성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자기가 수집한 NFT를 뽐낼 수 있는 공간이 관건이 될 것 같다. 메타버스가 장차 그런 공간이 될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내 고민은 따로 있다.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를 부정적으로 봤다. <유한계급론>이라는 책을 써서 신랄하게 이죽댔다. 발터 베냐민이 ‘아우라’를 사라져야 마땅한 유물로 본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한때 베블런과 베냐민을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들이 비웃던 낡은 세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처럼 군다. 먹고사는 걱정 때문일까, 아니면 창작자로서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