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방영된 tvN 드라마 <화유기>는 고대소설 서유기를 모티브로 요괴 손오공(이승기)과 삼장법사의 소명을 타고난 진선미(오연서)의 사랑을 담은 판타지 드라마였다. 현재 방영 중인 tvN 월화드라마 <계룡선녀전>은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 날개옷을 잃어 천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는 선녀 선옥남(고두심·문채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처럼 이계의 존재와 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가 최근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로맨스 드라마 장르의 최고 흥행작들이라 할 수 있는 SBS <별에서 온 그대>와 tvN <도깨비>도 이 계열에 속한다. 전자는 400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김수현)과 한류 스타 천송이(전지현)의, 후자는 도깨비(공유)와 도깨비 신부의 운명을 지닌 지은탁(김고은)의 사랑을 그렸다. 개성적인 캐릭터와 색다른 볼거리를 내세운 장르물의 인기와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진화 등이 이 같은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유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한 tvN 드라마 <계룡선녀전>.
눈에 띄는 것은 이들 드라마 안에서 남녀 주인공을 묘사하는 대조적 방식이다. 주인공 유형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이 인간보다 진화한 문명의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악귀와 맞서 조선을 구하는 뱀파이어(<밤을 걷는 선비>), 불멸의 반신 도깨비(<도깨비>), 악귀를 때려잡는 최강 요괴(<화유기>) 등으로 그려질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기억을 잃은 원귀(<아랑사또전>), 인간이 된 천사(<하이스쿨 러브온>), 육지에서 만난 첫 남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떠난 인어(<푸른 바다의 전설>), 699년 동안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선녀(<계룡선녀전>) 등으로 등장한다.
같은 이계의 존재인데도, 남녀의 캐릭터 묘사는 이렇게나 다르다.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악에 맞서 연인과 타인들을 구하는 슈퍼히어로적 능력이 강조되는 반면, 여자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보다는 신비로운 외모와 순수함, 그리고 남주인공을 위한 자기희생적 성격이 부각된다. 트렌디한 판타지 장르를 표방하면서도, 강한 구원자로서의 남성과 그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여성을 내세우는 전통적인 로맨스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제일 두드러지는 문제는 남자 주인공이 인간 문명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그것을 초월하기까지 하는 존재일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 문명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퇴행적 존재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0년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오랜 봉인으로부터 풀려나 남주인공 대웅(이승기)의 집에 살게 된 구미호(신민아)의 행동은 5세 아이 수준에 머문다. 미호는 청소 솔로 머리를 빗고 치약과 비누 거품을 맛있게 먹는 황당한 행동을 잇달아 하고, 대웅은 그녀에게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친다. 같은 작가가 쓴 <화유기>에서 요괴 오공이 구미호처럼 오랜 봉인에서 풀려났으나 그녀와 반대로 인간 세상에 천연덕스럽게 적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5년 뒤에 방영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더욱 심각하다. 어우야담 속 인어 설화를 각색한 이 드라마에서 원래 도도하고 똑똑한 인어였다는 심청(전지현)은 인간 세상에 나오자 스파게티를 손으로 집어 먹고 휴지를 뽑아 날리며 즐거워하는 등 새끼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남주인공 준재(이민호)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는 모습도 영락없는 유기견이다. 같은 작가의 전작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 도민준이 400년간 신분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완벽하게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재 방영 중인 <계룡선녀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 북두칠성 제1성 탐랑성을 관장하는 선녀였던 주인공 선옥남은 날개옷을 잃고 나무꾼의 아내로 살다가 그가 죽은 뒤에는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며 선녀다방 바리스타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나마 웹툰 원작에서는 신성한 존재로서 선녀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로맨스 드라마로 옮겨지면서 그러한 의미는 희미해지고 남편을 찾아 계룡산 깊은 산속에서 나와 21세기 서울과 처음 마주한 선옥남의 엉뚱하고 천진한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남주인공 정이현(윤현민)과의 약속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청포물로 머리를 감겨달라는 모습이나, 극장에서 영화 <킹콩>을 보면서 스크린 속 인물들을 향해 진지하게 말 거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서양은 문명, 동양은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이 남녀 구도에 가장 뚜렷하게 적용되는 장르가 이계 주인공 판타지 멜로드라마다. 똑같이 초월적 존재임에도 남주인공의 능력은 몇 배로 과장되고, 여주인공의 능력은 훨씬 축소되기 때문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 조선시대부터 400년 동안 쌓아온 지식을 활용하고 현재에는 대학교수로서 인간들을 가르치는 것과 달리, 고려시대부터 살아온 <계룡선녀전>의 선옥남은 ‘머리에 꽃 단’ 할머니(이용녀)가 옥남을 보고 되레 정신 나갔다고 여길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존재로 묘사되는 걸 보면 문제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여성의 존재만큼은 현실의 중력에 발 묶여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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