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아들 A는 단발머리다. 후배가 집에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머리를 잘라주다 보니, 성별을 떠나 A의 얼굴형에 짧은 머리가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정착한 게 단발머리였다. A도 그 머리 모양을 좋아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발머리를 하고, 자기 생각을 존중받으며 자란 A는 명랑하고, 자신보다 약한 친구를 돕는 일이나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A의 머리는 경쾌하게 반짝이고, 찰랑거렸다.
물론 주변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너 여자니? 남자니?”라는 질문을 종종 받아야 했고, 질문은 부모를 향한 훈계로 이어지곤 했다. “그래도 남자아이를 저렇게 키우면 안 되지” “너도 사실 이 머리 싫지? 엄마한테 잘라달라고 해” 등의 말들이 쏟아졌다. A가 혹시 학교에서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 후배는 여러 차례 A에게 머리를 자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A는 엄마는 어른인데 왜 그런 말을 하냐며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대답해 후배를 부끄럽게 했다.
며칠 전 후배는 학부모 상담 시간에 담임교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 한 학년 형이 “너 여자지!”라며 A를 놀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A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 형은 “그럼 옷을 벗어봐!”라며 놀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한 담임교사는 오히려 A를 나무랐다. “네가 가만있었으면 됐는데 따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 전제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머리를 자르면 된다”며 사건을 왜곡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에서 잘못한 학생이 아닌 A의 단발머리를 문제 삼은 것이다.
마치 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태도 등을 단속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담임교사는 그 사건을 후배에게 들려주며 A의 머리를 자르도록 종용했다. 후배가 반박해도 단호했다. 알고 보니 담임교사가 단발머리에 관한 일로 A를 지적한 것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그 사건 전에도 담임교사는 여러 차례 머리를 왜 기르는지, 자르면 안 되겠는지 A에게 물으며 못마땅해했다. A의 대답은 단순했다. “저는 이게 예쁘다고 생각해요.”
담임교사와 통화한 후 후배의 마음은 심란해졌다. 우선 A가 혹시 수치심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고, 그동안 자신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형성한 교육관이 부정당한 것 같아 괴로웠다. 무엇보다 학생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인권’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학교에서 인권에 관한 교육과 실천 부재는 물론, 기본적인 ‘성인지 감수성’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겼다.
후배는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담임교사가 학생이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폭력을 묵인했고, A가 ‘나다울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무시당한 일은 단지 A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 이런 일에 침묵하는 것은 오히려 교육적이지 않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2012년에 제정되어 공포된 서울시 학생 인권 조례에는 “학생의 의사에 반하여 복장, 두발 등 용모를 규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을 제대로 준수하라고 학교에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2021년이고 ‘단발머리’는 잘못이 없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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