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칼럼

[플랫]이슬아의 인터뷰하는 마음

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긴 원고의 교정을 보며 지내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새로 쓴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는 중이다. 수필집을 완성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체력을 쓰게 된다. 그렇게 품을 들이면서도 인터뷰라는 장르의 한계를, 나의 한계를 느끼고 만다.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늘 진실과 가깝지는 않다. 인터뷰를 당하는 것에 능숙한 사람은 능숙한 대로, 서툰 사람은 서툰 대로 진실과 먼 대답을 늘어놓곤 한다.

논픽션 글쓰기의 대가인 존 맥피는 <네 번째 원고>에서 이러한 심경을 밝혔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인터뷰를 시도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차라리 카프카와 함께 천장에 붙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할 것이다.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들이 평소 하는 일을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좋다.”

그래픽 이아름 기자

나 역시 비슷하게 느낀다. 두 시간 내내 어떤 사람과 마주보고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것보다 그의 일터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게 더 효과적인 접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첫눈에 알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질문하고 경청해야만 알게 되는 이야기가 아직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라서다. 나의 스승이자 친구인 정혜윤 PD의 말을 빌리자면 인터뷰란 “나는 잘하고 싶지만 잘 모른다”는 마음으로 출발하는 작업이다.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그래도 꼭 당신의 중요한 이야기를 잘 알아듣고 싶은 내가 인터뷰를 하러 간다.

 

빛나는 동료 창작자들과 예술가들도 만나지만 그만큼이나 공들여 준비하는 만남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과의 인터뷰다. 뉴스에도 없고 SNS에도 없는 사람. 너무 많은 말을 읽거나 듣거나 내뱉지 않는 사람. 마이크를 넘기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나보다 먼저 태어나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 그런 이들을 향한 질문지를 준비한다.

지난해 여름에는 1940년대에 태어난 이존자씨와 병찬씨를 만났다. 그들은 나의 외조부모다. 아파트 계단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존자씨가 충청도 사투리로 나를 타박했다. “근디 뭔 할무니 할아부지를 인터뷰한다고 그르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여!”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말하는 사람과의 인터뷰는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노동의 역사와 사랑의 역사와 고통의 역사와 한국 근현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이 웃어서 광대뼈가 욱신거렸고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목에 돌이 박힌 것처럼 아무런 추임새도 할 수가 없었다.

유명인만큼 공들이는 만남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과 인터뷰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글쓰기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 도움으로 완성되는 것 같다

비슷한 나이의 순덕씨를 만난 봄에는 커다란 고통의 세계의 일부를 전해들었다. 순덕씨는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서 27년간 청소를 해온 노동자다. 사건과 사고와 참말과 거짓말과 바이러스가 난무하는 코로나 시대에도 누군가는 계속 청소를 하고 있다. 그들이 치워놓은 자리에 겨우 다음 환자가 온다. 그러므로 청소는 소중한 미래를 마련하는 노동인데 응급실 청소 노동자의 인터뷰는 아직 어디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명의 얼굴과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2020년 4월 서울의료원 상황실에서 환경미화직원이 복도 바닥을 닦고 있다. 권도현 기자

그렇게 만난 순덕씨는 응급실 청소 기술의 디테일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어떤 풍경 속에서 어떤 사연을 목격하며 일하는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고통과 죽음에는 왜 담담해지지 않는지, 출퇴근 전후로 어떤 삶을 사는지도 들려주었다. 자신의 삶을 강타한 불행을 조심스레 꺼내놓기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순덕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게 너무 고달팠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나보다 더 고달픈 사람을 생각했어요.” 이 두 문장이 나란히 이어지는 게 기적 같다고 나는 적었다. 고달픈 나와 고달픈 당신 사이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다는 걸 안다. 그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의 강함을 순덕씨 얼굴에서 본다.

응급실이 아닌 밭 위에서 오랜 노동을 해온 농부님 인숙씨도 있다. 식탁에 오른 채소들의 경로를 되감기 하다가 만나게 된 사람이다. 인숙씨를 찾아가자 그는 내가 매일같이 먹는 버섯과 오이가 어떻게 시작되어 자라고 식탁에 오르는지 알려주었다. 사고로 비닐하우스에 불이 나 모든 작물이 다 타버린 해에도 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도.

인터뷰에서 그는 ‘새 마음’이라는 표현을 썼다. 뭐든지 새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자꾸자꾸 새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중한 일을 오랜 세월 반복해온 사람의 이야기였다. 종종 헌 마음으로 글을 쓰는 나를 떠올렸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글쓰기라는 게 혼자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내 질문에 대답해준 사람들의 도움으로 완성하는 게 글쓰기 같다. 그러므로 생소한 얼굴들에 대한 궁금함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런 당신이 되었냐는 질문을 멈추지 않고 싶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