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고백부부’, 영포티와 40대 여성의 소외

 

<고백부부>에서 마진주(장나라)가 육아에 지친 모습으로 전화받는 장면. <고백부부> 스틸 이미지

하루에도 신조어가 수십개씩 쏟아지는 시대에 최근 ‘영포티(Young Forty)’만큼이나 집중 조명받은 말이 또 있을까. 트렌드분석가 김용섭이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6>에서 과거의 X세대를 겨냥해 처음 명명한 이 단어는 당시만 해도 그리 새롭거나 주목받는 용어는 아니었다. X세대가 40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2010년대 초반부터 이들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회고열풍이 불면서, 이미 그들을 지칭해 생겨난 여러 호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회고열풍을 주도한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각각 유래한 ‘건축학개론 세대’와 ‘응팔 세대’ 등이 있다.

 

그 후로는 패션업계에서나 종종 언급되던 ‘영포티’가 갑작스럽게 ‘대부흥’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올해 4월 통계청 공식블로그에 올라온 글 하나가 계기가 됐다. “지금은 아재시대, 대세는 영포티!”라는 글이 SNS를 통해 뒤늦게 ‘발굴’되면서 집중포화를 맞은 것이다. 비판의 핵심 중 하나는 제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영포티’라는 단어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성을 소외시킨다는 데 있다. ‘영포티’의 유사어로 ‘아재슈머(아재+컨슈머)’를 들고, 월평균 소득과 지출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40대의 소비력을 찬양하는 이 글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남성과의 임금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시기인 40대 여성들의 현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영포티’ 논란은 그 허황된 신화의 기원을 마련한 1990년대 회고열풍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건축학개론>이 젠더의식 부재에 대한 여성들의 꾸준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놀라운 흥행기록과 함께 한국 멜로 영화의 신기원이자 1990년대 대중문화 신드롬의 주역으로 예찬받는 것처럼. 1990년대 신세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한 축이 여성주의문화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드라마만 보더라도, 당시 신세대의 새로운 재현양식으로 급부상한 트렌디물은 그야말로 신여성들이 주도하는 서사였다. 그 이전까지 가정멜로드라마 안에서 가족에 얽매여있던 여성들은 트렌디드라마 속에서 비로소 사회적 경력을 쌓으며 일과 사랑을 쟁취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한편에서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여자의 방> <아들과 딸> 같은 진지한 여성주의 드라마도 계속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1990년대 회고열풍에서 이러한 여성 주도 서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례로 <응답하라 1994>에서 대중문화 황금기를 재현하는 역할은 남주인공 ‘쓰레기(정우)’가 담당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같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슬램덩크> <영챔프> 등의 만화와 <모래시계> <마지막 승부> 같은 히트 드라마까지, 그가 읽고 보는 모든 것들이 당시 대중문화 아이콘의 집합이었다. 방영 당시 ‘쓰레기의 책장’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등장했을 정도다. 여주인공 성나정(고아라)이 전작 <응답하라 1997>의 여주인공에 이어 한 분야의 ‘빠순이’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시대상을 강박적이리만치 대표적인 기호들로 구현하면서, 연대생인 성나정(고아라)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는 장면이라도 나올 법한데 거기엔 도통 관심이 없다.

 

‘영포티’의 결정적 모델을 제공한 2012년 드라마 <신사의 품격>은 더 노골적이다. 91학번으로 등장하는 네 주인공은 1990년대 문화의 풍요로운 자산 안에서 획득한 세련된 감각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41세인 현재에도 당당한 매력을 유지한다. 반면 1990년대 회상 신의 같은 세대 여성들은 미팅의 ‘폭탄녀’나 모두의 사랑을 받다가 급작스럽게 사라진 애증의 첫사랑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2012년의 현재에는 그나마도 찾아볼 수 없다. ‘영포티’ 남성들의 옆에는 그들에게 순정을 바치는 젊은 여성들만 존재한다.

 

한때 같은 신인류로서 황금기를 누리던 여성들은 현재 어디로 사라졌을까. 1990년대 회고열풍의 남성 중심 서사들 속에서는 그들의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신사의 품격>에서 만인의 첫사랑이었던 김은희(박주미)는 20년 만에 나타나 옛 연인 도진(장동건)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고 혼자서 다 키운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다시 사라진다. 심지어 도진의 젊은 새 연인에게 “이렇게 곱게 나이들 만큼 행복한 누군가의 와이프”가 됐으니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까지 해준다. 어린 나이에 홀로 아들을 낳아 키웠을 그녀의 오랜 고통이 작품 속에서 고작 몇 줄 대사로 처리되는 것은 ‘영포티’ 서사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 소외 서사는 최근 방송된 KBS 드라마 <고백부부>에서도 나타난다. 40대를 앞둔 부부가 18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말하자면 ‘응답하라 1999’다. 2017년 현재에서, 마진주(장나라)와 최반도(손호준)의 고통은 같은 무게로 그려진다. 전업주부 진주가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동안 영업직인 반도 역시 고객의 ‘갑질’에 지쳐간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이 균형은 깨진다. 반도는 못 이룬 첫사랑을 찾으며 연애를 즐기는 데 반해 진주는 여전히 2017년에 두고 온 아들 생각에 밤마다 운다. 결말 역시 진주가 현재에는 사망하고 없는 엄마의 부재를 채우며 더 강한 엄마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반도가 과거의 투자로 재력을 얻어낸 성과에 비하면 진주의 여정은 결국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에 그친다. 이마저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투사였던 진주 친구 보름(한보름)이 불임 때문에 남자를 보내준 순정녀가 된 결말에 비하면 무난할 지경이다. 남성들이 ‘아재파탈’ ‘영포티’ 등으로 부지런히 호명되는 동안, 여성은 존재 증명조차 이토록 버겁다.

 

<김선영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