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60일, 지정생존자’가 보여준 새로운 리더십

tvN의 새 월화극 <60일, 지정생존자>. 극중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한날한시에 사망한 대형 참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환경부 장관 박무진(지진희·왼쪽 사진)과 박무진의 아내이자 인권변호사인 최강연(김규리·오른쪽).


tvN의 새 월화극 <60일, 지정생존자>는 2016년 방영을 시작한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은 연두교서 발표가 진행 중이던 국회의사당에서 대형 폭발사건이 발생해 대통령과 그 직위를 승계할 고위 관료들이 동시에 사망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가공할 상상력 같지만, 미국에는 실제로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이 존재하고 있다. 대통령과 그 승계자들이 모두 사망하는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 미리 지정된 특정인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 제도다. 


본래 냉전시대의 유산이지만,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 때 미국 의사당 테러를 기획한 이슬람국가(IS) 추종자 사건처럼 대테러 시대라는 새로운 위기를 맞아 다시 관심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원작이 호평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시의성이었다. 특히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리더십의 문제가 공감을 샀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할 이상적인 리더는 누구인가. 원작의 주인공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은 선출직 경험이 없는 학자 출신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에서 엉겁결에 대통령직에 올라 전대미문의 위기를 수습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주목받는다.


<60일, 지정생존자> 역시 바로 이 리더십에 초점을 맞춘다. 국내에는 없는 지정생존자 제도, 낯선 정치 스릴러 장르 등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몰입도를 높였다. 드라마는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한날한시에 사망한 대형 참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환경부 장관 박무진(지진희)이 정부조직법 26조 1항에 의거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데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카이스트 화학과 교수였던 박무진은 양진만 전 대통령(김갑수)으로부터 미세먼지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치경력이라곤 고작 6개월이고 미세먼지 수치나 세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준전시 상황의 국군 통수권자이자 최고권력자가 되자 모두가 그의 능력을 의심한다. 무진 자신도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은데,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비서실장은 “모든 일은 나와 여기서 처리할테니 박 대행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부탁한다. 이 난관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박무진이 어떤 리더로 성장할 것인가가 이 작품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60일, 지정생존자>에는 그동안 우리 정치사가 경험한 리더십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가령 국방부 장관을 대신해 돌아온 합참의장 이관묵(최재성)이 군부 시대의 제왕적 리더십을 대표한다면, 테러로 사망한 전직 대통령 양진만은 민주 정부 시대의 탈권위적이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대변한다.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새로운 지도자가 된 박무진의 캐릭터는 사실 현실 정치인이라기보다 국내 정치드라마 속의 리더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예컨대 SBS <시티홀>의 신미래(김선아), <대물>의 서혜림(고현정), KBS &lt;어셈블리>의 진상필(정재영), KBS <국민 여러분!>의 양정국(최시원) 등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았기에 평범한 시민들을 더 잘 대변할 수 있는 참신한 정치인이라는 주인공 계보의 특징을 박무진 역시 이어가고 있다. 북한과의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두고 “잠수함 승조원들 가족이 기다릴 겁니다. 아침에 집을 나갈 때 그 길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라고 말하면서 참모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박무진 캐릭터에서 기존의 리더십 판타지보다 한 걸음 더 나간 점이 있다면 ‘시민의 책무’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는 박무진에게 비서실장 한주승(허준호)은 말한다. “대통령으로 권력을 행사하라는 게 아닙니다. 시민의 책무를 다하라는 겁니다. 권한대행 자리에 박무진 당신을 지목한 건 이 나라 헌법이니까.” 한주승의 말은 한 사람의 리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분야의 자리에서 원칙을 지키며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시민들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전대미문의 국가 재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체제가 마비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거나 누군가의 부재를 채우는 인물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실종된 약혼자에 관한 걱정을 미루고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는 국정원 대테러팀 분석관, 인간적으로 존경하던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뒤로하고 묵묵히 대국민 담화문을 작성하는 연설비서실 행정관, 사망한 의전비서관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그의 역할을 대신하는 의전비서실 행정관 등 모두 박무진과 마찬가지로 성실한 직업인이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인물들이다. 청와대 스태프들의 빈 책상에 국화꽃을 놓는 직원들, 국회의사당이 무너진 자리에 출동해 사람들을 구하는 소방관들, 질서를 통제하는 경찰들, 병원에 실려 온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도 마찬가지다. 


<60일, 지정생존자>의 리더십 판타지에서 새로이 주목할 점이 있다면, 권력자들이 벙커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동안, 실질적으로 ‘정상국가’ 시스템을 묵묵히 지킨 시민들의 모습일 것이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