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조선판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

MBC 수목극 <신입사관 구해령>은 2003년 방영된 MBC <대장금>에 이은 여성 궁궐 전문직 드라마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이야기답게 기존의 남성 중심 궁중 사극과 차별화된 설정이 돋보인다. 중종실록의 단편적 기록을 토대로 한 <대장금>은 ‘조선시대 최초 어의녀’의 성공기를 통해 궁궐 안 여성들의 전문 영역을 재발견했고, 마찬가지로 중종실록의 한 기록에서 출발한 <신입사관 구해령>은 ‘조선 첫 여성 사관(史官)’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여성들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다만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전자와 달리, 후자는 가상의 주인공을 내세운다. 남성들의 전문 영역인 ‘역사의 기록’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가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목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은 ‘가볍다’고 평가받는 로맨스 퓨전 사극의 외피를 통해 오히려 지금의 시대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MBC 제공


<신입사관 구해령>은 중종실록에서 단순히 논의에 그쳤던 ‘여성 사관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배경은 가상의 왕인 현암군 이태(김민상)가 다스리는 19세기 조선, “잘 가꿔놓은 꽃나무, 한 폭의 그림, 규문 안 장식품”의 운명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26세가 되도록 신부수업도, 혼인도 마다하고 더 넓은 세계를 꿈꾸는 독서광 구해령(신세경)도 그들 중 하나다. 조선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 민익평(최덕문)이 개혁적인 세자 이진(박기웅)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제안한 여성 사관 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해령과 같은 여성들에게 신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준다. 


이 드라마가 정말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여성 사관들의 궁궐 입성 이후부터다. <대장금>에서 궁에 들어간 장금(이영애)이 여성들의 전문직 공간으로 재해석된 수라간에서 여성들 간의 경쟁과 연대의 서사를 써나갔다면, <신입사관 구해령>은 철저히 남성들의 세계인 예문관에 들어가 충돌하며 성장하는 해령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여성 대안 서사를 쓴다. 말하자면, <신입사관 구해령>은 “남녀가 유별하고 강상의 도가 지엄한” 기존의 지배 질서가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에, 각성한 여성들이 들어가서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내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어려운 별시 관문을 통과하고 부푼 꿈을 안은 해령과 동료들은 궁에 입성하자마자 “사관과 여사는 다르다”는 차별에 맞닥뜨린다. 민익평은 애초에 “사관은 정사를 기록해 만세에 남기는 것이 직무이나, 여사는 궁중의 일상생활을 보고 적기만 하면 되니 언문을 아는 궁녀들을 뽑아 써도 충분하다”고 한계를 분명히 한다. 민익평의 말에는 조선의 이분법적 위계 구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초반부터 조정이 백성들의 서책을 금서로 지정해 불태우는 장면을 통해 국가가 주도하는 질서와 그에 종속된 세계의 위계를 보여준 바 있다. 사대부 대 백성, 역사 대 언문 소설, 대전의 정사 대 내전의 사생활, 남성 대 여성 등 이 모든 대립항의 후자에 위치한 존재가 ‘여성 사관’들이다. 


하지만 ‘여사’들의 활약은 이 경계를 조금씩 허물어뜨리기 시작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세자와 세자빈의 ‘부부싸움’ 일화다. 민익평과 대립하는 세자는 그의 딸인 세자빈을 “좌상의 귀가 되고 눈이 되는 여식”으로 여겨 멀리하고, 참다못한 세자빈은 여사들을 대동한 채 세자를 찾아간다. 세자빈은 자꾸만 합방일을 미루는 세자에게 그동안 쌓인 속마음을 토로하고 여사들은 이를 모조리 기록한다. 이 전무후무한 ‘궁궐 부부싸움’의 기록은 궁 안에 격한 논쟁을 불러온다. 삭제하자는 이들은 “사관이 남기는 게 조정의 역사지 누군가의 치부는 아니며, 딱히 정치에 관련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해령은 “내전에서 일어난 일도 역사로 기록하라고 우리가 있는 건데 이런 식으로 무엇을 남길지 말지를 선별해서는 안된다”고 맞선다. 


해령의 주장대로 세자빈의 말은 조선 여성들의 불합리한 조건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이며 중요한 역사다. 후사를 잇는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왕대를 끊은 계집”으로 멸시당하며 “정국의 불안과 흉년도 모두 부덕한 빈궁의 책임”으로 돌아온다는 말에는 지엄한 신분이라고 해도 종속된 존재와 다름없는 여성의 현실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 들어 있다. 그의 목소리를 한 자도 빠짐없이 옮겨 적은 여성 사관들의 행동은 그동안 ‘하찮은 것’으로 취급당하며 침묵당해온 역사를 기록하는 정치적 행위로서 조선의 질서를 흔들게 된다. 


요컨대 <신입사관 구해령>은 흔히 ‘가볍다’고 평가받는 로맨스 퓨전 사극의 외피를 통해 오히려 지금의 시대의식을 제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령과 도원대군 이림(차은우)이 사랑에 빠지면서 특유의 로맨스 관습을 반복하기도 하나, 이 연애 역시 집안이 정해준 혼처가 아니라 여성들의 자유의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정치적 투쟁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여전히 공고한 지배 질서 안에서 각성한 여성들이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첫 회에서 부당한 조정의 처우에 항거하는 해령에게 “돌 하나 던져 강을 메울 셈이냐”고 묻는 오라비를 향해 해령이 한 말에 답이 있다. “메울 수는 없어도 일렁이게 할 수는 있겠죠.” <신입사관 구해령>은 조선판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을 통해 그 작은 일렁임이 모여 강의 흐름을 바꾸어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