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검은 황금, 검은 깃발

존 제라드, 웨스턴플래그(스핀들톱 텍사스), 2017, 시뮬레이션, ⓒ존 제라드

1901년 1월10일, 석유 전문가들이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고 보았던 텍사스 스핀들톱에서 두꺼운 메탄가스 기둥이 솟아올랐다. 수년간 반복되는 시추 실패로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이들은, 미국 연간 시추량이 총 83만배럴이던 그 시절에 하루 10만배럴을 뽑아내는 유전을 찾아내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스핀들톱 근처 보몬트로 전국의 투자자, 투기꾼들이 모여들었다. 셀 수 없는 시추탑이 땅 위로 솟았다. 스핀들톱 유전의 수명은 매우 짧았지만, 유전 개발 붐은 미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황금’ 석유가 대표하는 화학에너지에 기대어 살아온 인류가 지금껏 이룩한 문명의 대가는 회복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황폐화된 자연이다. 작가 존 제라드는 개발 광풍이 지나간 후 황무지가 되어버린 땅 스핀들톱에 긴 관을 꽂았다. 관의 상단부에 뚫린 7개의 구멍으로부터 마치 시추탑 위로 메탄가스가 솟아오르던 그날처럼 검은 구름이 뿜어져 나온다. 대지 위에 깃발처럼 매달린 시커먼 구름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신호처럼 펄럭인다.

 

작품을 위해 작가가 매연을 내뿜으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 검은 깃발은 초당 50프레임의 속도로 실시간 렌더링하는 영상 속에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얼마 전, 2017년 제작한 이 작품 ‘웨스턴플래그’의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 버전을 내놓았다. 그는 판매수익의 50%를 암호화폐펀드 regenerate.farm에 기부하여 흙에서 화학비료를 걷어내고 탄소발자국을 줄여나가는 일을 도울 계획이다. 본 작품은 regenerate.farm/NFT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깃발이 펄럭인다.

 

김지연 전시기획자·d/p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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