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무한대를 향한 길 로만 오팔카, 1965/1-∞ 작업과정 ⓒRoman Opalka, 사진 빈센트 레스피나스 어떤 이유였을까. 아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바르샤바의 카페 비스톨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작가 로만 오팔카는, 1에서 무한대에 이르는 숫자를 그려나가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1965년, 1931년생 작가는 1부터 시작해 매일 약 400개의 숫자를 그리면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숫자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196×135㎝의 검은색 캔버스를 선택한 작가는 0호 크기의 세필로, 1부터 이어지는 숫자를 오른쪽으로 차근차근 그렸다. 3년이 지난 1968년부터 그는 캔버스의 바탕색을 회색으로 바꾼다.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어떤 상징도 연상시키지 않았던 회색은 감정의 동요 없.. 더보기
현재의 기억 알레한드로 세사르코, Present Memory, 2010, HD video, 16mm film, color no sound, 4min ⓒAlejandro Cesarco 우리는 결국 모두 죽을 테지만, 마치 그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죽음의 시기를 상상하는 삶과 외면하는 삶은 개인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까? 지인이 심장마비로, 사고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이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갑자기 들려오는 죽음에 대한 소식은 주변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살아 있는 자들은 그 죽음 앞에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실감하면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지만, 오래지 않아 그날의 긴박한 감정은 잊고 죽음이 지워진 일상에 매몰되어 삶의 속도를 올린다. 긴 세월 투병 끝에 세상을.. 더보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맹인에 대한 편지 하비에르 텔레즈,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맹인에 대한 편지, 2007, 싱글채널 비디오, 27분 36초 ⓒJavier Tellez,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Peter Kilchmann, Zurich 여섯 명의 시각장애인이 미국 브루클린 매카렌 공원의 오래된 수영장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 앞으로 거대한 코끼리가 등장한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가 코끼리를 만진 다음 처음 앉아 있던 벤치로 돌아간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하비에르 텔레스는 인도의 경면왕이 시각장애인들을 모아 코끼리를 만져보게 했다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의 장면을 구현해보았다. 옛글에서 시각장애인들은 각자가 만져본 부분으로부터 ‘무’ ‘키’ ‘돌’ ‘절굿공이’ ‘널빤.. 더보기
주름 속의 삶 카를로스 아모랄레스, Life in the folds, 2017 ⓒ베니스 도큐멘테이션 프로젝트 허구와 악몽을 능가할 만큼 엽기적인 사건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그 상황 안에서 무기력해진다.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아모랄레스는 일상이 불균형과 불평등으로 뒤덮여 있고 극심한 폭력이 빈번한 나라 멕시코의 현실을 바라보며 애니메이션, 음악, 문학, 공연, 설치로 구성된 작품 ‘주름 속의 삶’을 제작했다. 그는 악의에 찬 세계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고뇌와 무력감을 독특한 풍자와 유머로 표현하던 작가 앙리 미쇼의 글 ‘주름 속의 삶’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멕시코가 손댈 수 없는 혼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원인과 그 결과를 어떻게 예술언어로 표현할 것인지 고민했던 작가는, 암호화된 알파벳으로 멕시코의 정치문제에 대한 비.. 더보기
달링 달링 가브리엘라 허스트, 달링 달링, 2021, 2채널 비디오, 25분33초 ⓒGabriella Hirst 광주 거리에 물을 절약하자는 현수막이 붙었다. 극심한 가뭄에 제한급수를 해야 하는 위기 상황이라고 한다. 각자의 가정에서 수압을 조절하면 물을 절약할 수 있다고 했다. 손쓸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 함께 대처하자는 내용을 보며 수압 밸브를 찾아본다. 세상에 과연 지속 가능한 구조나 시스템이 있을까. 제도가 규정하는 틀 역시 세월이 흐르면 그 가치와 효용성은 변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필요하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여러 제도, 구조, 약속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노동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2채널 비디오 작품 ‘달링 달링’.. 더보기
엘리펀트 보슈라 위즈겐, 엘리펀트, 2022, 1시간 ⓒBouchra Ouizguen, 사진촬영: Beniamin Boar 머리에 무거운 터번을 쓴 이들이 무대의 바닥을 닦고, 향을 흔들었다. 양탄자를 바닥에 펼치자, 무대는 마치 모로코의 가정집, 마을 어귀 같은 삶의 공간이 되어,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반복해온 덕분에 능숙해진 퍼포머들의 소리와 움직임을 담는다. ‘엘리펀트’는 모로코 출신 안무가 보슈라 위즈겐이 긴 시간 협업해 온 모로코의 여성 퍼포머들과 함께 작업한 콘서트이자 퍼포먼스다. 그들은 홀로, 둘이, 셋이, 넷이 노래하고 춤춘다. 어떤 치밀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기보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장면의 파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 안에서 관객을 붙잡는 것은 퍼포머의 목소리.. 더보기
돌의 기록 김경태, 임재수 박사 팀이 채굴한 섀터콘, 2022, ⓒ김경태 돌을 분석해 지구가 겪어 온 과거의 기후와 환경의 변화를 추적하는 지질학자 임재수는 호수 퇴적체를 통해 땅이 기록하고 있는 시간을 추적한다. 환경 변화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호수 바닥의 퇴적층은 좋은 연구대상이다. 빗물이 흐르고 황사가 스친 움직임의 흔적, 꽃가루, 플랑크톤 같은 생명의 흔적을 살피면서 홍수와 가뭄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 인류의 정주와 이주의 원인까지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우주와 지구를 향한 인간의 지식과 상상력을 넓히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퇴적체 연구를 위해 전국의 분지 지형을 살펴보던 그는, 백악기 퇴적암으로 둘러싸인 합천 초계분지의 지형에서 운석 충돌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과거 .. 더보기
널 사랑하지 않아 문선희 작가가 운전을 하고 가던 길에서 처음 만난 고라니에 대한 기억을 나누어주었다. 도로를 가로지르던 중 잠시 멈춰 선 작은 생명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눈길로 작가를 바라보았다. 이내 다시 달려가기 시작한 생명 뒤를 어떤 동물이 빠르게 추격했다. 이 생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작가는 곧 자료들을 통해 고라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라니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문선희는 상처 입은 고라니들을 돌보고,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참여했다. 위축되어 있는 다친 고라니가 보호소에 머무는 동안, 작가는 그들의 초상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지난 10년간 만난 고라니들의 초상사진을 최근 발표했는데, 마치 고라니들의 졸업앨범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카메라를.. 더보기
이상한 메타버스 2016년, 인공지능에게 시인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교재 삼아 그의 문체를 학습시키고, 재개발이 아니라 도시재생이 결정된 익선동에 대한 시를 쓰게 했던 작가 권두영이 이번에는 이상의 문체로 메타버스를 탐색했다. 인공지능은 이제 물리적 공간의 건물, 골목길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 안에 구축된 메타버스 속 공간을 거닌다. 2021년 미디어아트 그룹 슬릿스코프와 카카오브레인이 공동 개발해 탄생한 인공지능 시인 시아는 인터넷 백과사전과 뉴스로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근현대 시 1만2000여편을 학습하며 시작법을 배운 뒤 올여름 개인 시집도 발표했다지만, 권두영이 함께하는 인공지능은 오로지 ‘이상’의 문체만을 학습한다. 100년 전 사람들에게 낯설 뿐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한 시를 선보였던 시인의 기술(이라고 .. 더보기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하얗게 비어 있는 종이는 그 가능성과 비례하여 시작에 대한 막막함을 던지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백지 앞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 김정기에게 빈 종이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설렘의 장이다. 밑그림 없이 시작하는 라이브 드로잉인데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펼쳐지는 그의 그림은 우리의 익숙한 일상을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연결한다. 휴지든, 전단이든, 달력이든 관계없이 그 종이 위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끄적이며 훈련해온 그는 눈앞의 대상을 보고 옮기기보다,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 그린다. 그렇게 그릴 수 있기까지 그는 스쳐지나가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림일기를 그리면서 시각적인 기억력을 높였다. 오랜 세월 머릿속에 저장해온 장소, 사람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작가의 호흡에 .. 더보기
바이오그래피 “향기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향기만으로 그때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낼 수 있고, 향으로 역사적 인물을 떠올릴 수도 있지요. 공기는 인간뿐 아니라 세상 모두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기는 미술의 너무나 큰 소재가 될 수 있지요. 향기는 공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구이며, 하나의 조각입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인간·비인간을 다른 감각으로 소환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아니카 이는 사회의 한계를 거부하고 도전해 온 인물들을 불러내고, 모든 여성이 유연하게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세 여성에 대한 향수를 제작했다. 극좌 성향의 일본 적군파 지도자이자 테러리스트, 혁명가로 언급되는 시게노부 후사코를 모델로 한 ‘시게노부 트와일라잇’, 고대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 핫셉수트에 대한 향수 ‘급진적 절망.. 더보기
움직이는 숲 햇볕도 바람도 좋았던 지난 토요일,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했다. 행진 대열에는 어떤 이념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이 하나의 주제를 고민하며 모였다. 기후재난의 심각성을 공유하는 발언을 듣다 보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현재 지구가 보내는 기후위기에 대한 신호는 심상치 않다. 이 선명한 신호를 외면하면서도 인간이 지구 위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많은 예술가는 기후위기 문제를 고민하며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2020년 여름부터 강원도 화천의 문화공간 예술텃밭에서는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레지던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문화예술계의 예술가, 기획자, 기록자들이 함께 기후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각자의 주제를 탐구하면서 작업을 발전시켰다. 참여 작가 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