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완벽한 최후의 1초는 단 하나의 정답을 꿈꾸지 않는다 한 예술가의 삶이,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을 자극하는 ‘원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시대를 초월해 재정의되는 창작자의 존재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창작방법론이 구현하는 장면의 의미를 다른 시공간의 시선을 빌려와 환기시켜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이하는 백남준을 기념하며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준비한 특별전 ‘완벽한 최후의 1초 - 교향곡 2번’은 ‘백남준’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교감하여 또 다른 의미와 감각을 만드는 장면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백남준이 1961년 작곡한 텍스트 악보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을 국내 최초로 시연하는 이 전시는 지시문으로 채워진 사각형 모양의 악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 더보기
국가라는 정의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 나라의 외교관은 아침에 출근해서 무슨 일을 하는가. 영토, 정부, 국기, 언어가 있지만,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국가 압하지야. 다른 어느 국가도 이곳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압하지야는 경계에 걸쳐 있는 공간, 리얼리티의 틈새에 갇힌 채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압하지야 공화국의 외무 장관 ‘막스 그빈지아’에게 편지를 보낸 작가 에릭 보들레르는, 딱히 그로부터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수취인불명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높은 편지를 적으면서, 국가의 정의를 고민했을 뿐이다. 뜻밖에 답신을 받은 보들레르는 막스와 서신을 교환했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80년대 후반 소련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조지아 공화국은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 더보기
도시를 상상하고 짓는 일 오스트리아 건축박물관에서 건축 시뮬레이션 게임과 장난감을 주제로 한 전시를 열었다. 나무 블록, 카드 보드를 이용한 전통적인 ‘집짓기’ 게임부터 콘솔, 컴퓨터, 모바일 앱 게임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플랫폼을 확보한 게임이 등장한다. 박물관 측은 이런 건축 게임과 장난감 안에는 우리의 문화 및 기술적 유산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게임의 주요 플랫폼이 변하는 것 역시 사회사, 기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 게임의 세계 안에서 관객들은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건물을 짓고, 마을을 설계한다. 마을을 구축하면서 관객·유저들은 그들이 내리는 결정이 세계를 물리적으로 건설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삶의 질서와 가치 등의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더보기
우리가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 것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권, 자유권,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있다.” 대영제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간 전쟁이 멈추지 않던 시기, 대영제국으로부터 온전히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미국의 독립 선언문은 민주주의와 자유, 독립정책에 대한 이들의 열망을 엄숙하게 담고 있다. 작가 마타나 로버츠는 2020년 미국인들이 겪었던 사건을 영상과 사운드 설치로 담은 작품의 제목으로 선언문 가운데 한 문장인 ‘우리는 이 진리를 믿는다’를 선택했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정신 아래,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사이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던 대통령 선거, 백인 경찰관의 강압체포로 흑인 남성.. 더보기
예술가와 전쟁 평화,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허약한 것 같다. 너무 쉽게 무너지고, 회복은 어렵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지구 한쪽에서 평화는 무너져 내렸고, 폭격 아래 희생자가 속출한다. 누구의 목적과 욕망을 위하여 평화는 깨어지는가. 평화를 망가뜨릴 수 있는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우크라이나 파빌리온 참여 작가 파블로 마코프는 작업을 중단했다. 전투기가 오가고 총알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작품을 마무리짓고 베니스로 작품을 보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르키우에서 가족과 은신하고 있는 작가는 우리가 믿어온 자유, 평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 탄식한다. 예술계는 파블로 마코프와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더보기
콩과 들깨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집중 공습을 받아 초토화된 로테르담은 도시 재건 과정에서, 옛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를 만드는 방향을 선택했다. 한편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현재성만을 추구했던 근대 건축의 방식을 모두 걷어내고, 중세의 수공업적 시민도시의 모습으로 프라이부르크의 시간을 돌려놓았다. 도시가 건축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동시대와 접점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는 도시인들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담기기 마련이다. 광주시가 광주비엔날레재단과 함께 2011년부터 시작한 ‘광주폴리’는 도시의 물리적 재건이 아니라, 내용적 재건에 대한 도시와 예술의 선택을 보여준다. 건축계에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장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건축물을 뜻하는 ‘폴리’는 광주에서 ‘기능을 회복.. 더보기
공정한 게임 보드게임 모노폴리나 부루마블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게임 위의 세계는 실제 세계의 축소판처럼 작동한다. 좋은 땅은 돈 많은 자의 차지가 되고, 돈은 당연한 듯 돈이 있는 자에게만 흘러들어간다. 게임의 초반, 참여자가 발휘하는 자산운용 전략은 능력보다 운에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정말 자본주의의 생리라면, 우리는 과연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자조적인 말을 내뱉으며 게임판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 독과점의 세계를 실감나게 가르쳐주는 이 게임들의 원형은 1904년 리지 매기가 개발한 ‘집주인 게임’이다. 하지만 리지 매기가 게임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독과점의 위험성이었다. 그는 집주인이 임대료 수입을 통해 부를 쌓는 원리를 경험하는 게임 참여자들, 특히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이 구조를.. 더보기
마녀의 요람 안무가, 무용가, 영화이론가, 영화제작자, 시인으로서 1940~1950년대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엘레노라 데렌코브스카(1917~1961)는 1943년 뉴욕에 정착하면서 ‘마야 데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스어로는 ‘신의 메신저’, 산스크리트어로는 ‘환영’이라는 의미를 가진 마야는 그의 영화적 이미지를 지배하는 바다, 환상, 마술, 여인 등 그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그는 예술의 여러 속성과 영화의 기술적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실험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데 능숙했다. 기이한 이미지들과 파편화된 흐름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녀의 요람’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공간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당시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페기 구겐하임.. 더보기
시신세 종말은 인류처럼 지구에 기생하는 유기체의 문제이지 지구의 관심사는 아니다. 환경이 황폐해졌다고 지구가 상처 입을 일은 없다. 판게아가 갈라지고, 마그마가 분출하고, 해일이 몰아치고, 해수면의 온도가 올라간들, 지구는 끝나지 않는다. 자연재해의 이름으로 생태가 뒤집히고, 몇몇 생명체가 멸종할 뿐. 지질학적 시간을 스치고 사라지는 유기체의 일대기는 미약하다. 막스 후퍼 슈나이더는 포유류가 대륙마다 다른 양상으로 진화하고 신생대형 생물군이 크게 번성했던 시신세(始新世, Eocene epoch·약 5600만년 전~3390만년 전)의 생명을 상상했다. 원숭이는 출현했으나, 기억과 역사를 재구성하며 능숙하게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축적해 온 인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이 시기에 오늘날 살아남은 대다수 동식물의 조상.. 더보기
선물 최고의 선물을 ‘현금’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섬세하게 준비한 선물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친구에게 어떤 선물이 좋은지 물었더니, 갖고는 싶지만 내 돈으로 사기는 아까운 것이 좋다고 했다. 실용적이지 않은 것, 너무 비싼 것,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 등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요새는 소셜미디어에 있는 ‘선물하기’를 즐겨 사용하는데, 선물이 오가는 명절을 앞두고는 좀 더 자주 들락거린다. 대목을 맞이한 이들은 ‘설날’ 카테고리를 만들고, 건강, 부, 행복 꼭지 안에 여러 상품을 큐레이션 해두었다. 하지만, 정작 내 눈길을 사로잡는 카테고리는 ‘쓸모없는 선물’이다. 혼술용 도구, 집순이를 위한 담요, 티슈모자, 심지어 콩나물키트까지, ‘알고 보면 쓸.. 더보기
감정을 읽는 인공지능 예술을 창작하는 인공지능이 문학, 음악, 시각예술계에서 종종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스탠퍼드대학의 연구원들이 예술작품에 깃든 감정을 읽고 표현할 수 있는 인공지능 ArtEmis를 탄생시켰다. 연구진은 인공지능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영역 내에 존재하는 사물·동물 및 활동을 인식하는 단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성지능으로까지 향상시키고자 했다. 그 학습 매개로는 시각예술을 선택했다. 그림을 통해 ArtEmis가 학습한 감정은 경외감, 즐거움, 두려움, 슬픔 같은 것으로, 그는 구상적인 그림뿐 아니라 추상화에 대해서도 감정적인 반응을 표현할 수 있다. 연구진은 그가 이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하기 위해 8만1000점 이상의 그림을 보여줬다... 더보기
보라 “친애하는 알래스카 주민 여러분, 알래스카주에 멋진 일이 벌어집니다.” 알래스카의 찬란한 자연경관 사이로 개발 현장이 겹쳐 오를 때, 앵커리지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과거’의 목소리가 전시장을 울린다. 앵커리지 부지를 사들인 부유한 자들이 약속한 ‘지상낙원’이 자연을 훼손하는 대가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들은 그들에게 다가올 풍요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누군가 선택하고 제안한 삶의 방식 앞에, 한편은 호응하고, 한편은 침묵으로 동조하는 동안, 우리의 삶은 아마도 더 편안해졌고, 안전해졌고, 부유해졌다. 일단 우리는 그렇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는 어떠한가. 부산현대미술관의 ‘그 후, 그 뒤’ 전은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란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