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무쾌감증 소파에 앉은 그가 휴대폰으로 시선을 보냈다. 야자수 앞에서 시원한 복장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싱그러운 혈색이 모니터를 채운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가 태블릿을 터치하자, 화면에서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한 아이가 놀이 기구에 매달려 흔들리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이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음악을 듣고, 악기를 연주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그들의 세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일상이 흐르는 주택가 소소한 풍경 속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들은 지금을 즐길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재키 코놀리가 비디오 게임용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작품 ‘무쾌감증’은 일상적인 즐거움에 .. 더보기
역사의 역학 1851년 프랑스 과학자 장 베르나르 푸코는 파리 판테온의 돔에서 황동으로 코팅한 28㎏의 추를 매단 67m의 실을 내려뜨렸다.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였고, 진동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회전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여준 그는 지구의 자전 검증에 성공했다. 중력에 반응하는 신체의 다양한 상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품을 발표해 온 안무가 요안 부르주아는 진자가 흔들리던 장소 판테온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역사의 역학: 정점에 닿기 위한 시도’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는 회전계단과 트램펄린을 활용하여 운동의 법칙과 에너지, 더 나아가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를 향한 작가의 탐구를 담은 작업이다. 회전하는 계단을 오르내리던 퍼포머가 꽃잎처럼 펄럭이며 계단 아래로 떨어진다. 퍼포머가 떨어질 때, 그.. 더보기
라디오 발레 경험으로부터 배웠을까. 공공의 통제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므로, 이제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은 억압적인 관행을 받아들인다. 벤치가 좌석으로 바뀌면 누울 수 없고, 어두운 골목에 조명을 밝히면 은밀하게 움직이기 어렵다. 공간의 배치, 건축, 디자인, 이 모든 것은 움직임을 통제한다. 움직임을 통제한다면 생각마저 통제할 수 있을까. 권력은 어떻게 개인들의 일탈을 몰아내고, 심지어 일탈이 그들에게 불리한 선택이라는 것을 설득할까. 1995년 결성한 미디어 이론가이자 아티스트 그룹인 리그나는 권력이 일탈을 조절하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좌파 활동가들이 라디오를 메시지 전달용 오픈마이크로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리그나는 라디오가 항상 추상적인 청.. 더보기
기억은 녹아내리고 기념하는 자는 분주하다. 그가 영민하게 붙잡은 기념의 명분은, 엉성하지만 끈질기게 쳐놓은 기억과 기록의 네트에 힘입어 허공에서 출렁인다. 그물 짜기에 지친 메마른 자들이 어설픈 네트 사이로 힘없이 떨어지면, 여기 걸터앉은 기름진 야망은 변주된 명분의 그물을 엮어나갈 터. 네트는 넓어지는 만큼 무거워지겠지만, 결단코 바닥에 닿을 수는 없다. 네트는 구조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수해를 입은 필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홍진훤은 녹아내린 필름을 복원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기로 한다. ‘민족사진연구회’가 30년 전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찍은 A컷 필름 북으로 추정되는 이 기록물은, 당시의 현장, 기록자의 시선, 현재의 쓸모를 재단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그 .. 더보기
당신의 울타리 언제부터 땅에 주인이 생겼을까. 토지는 어떤 계기로 사유화되었고, 그 당위성을 확보했을까. 레이철 로즈는 토지 사유화가 가속화되던 17세기 영국 농촌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다루면서, 지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뿌리를 탐구한다. 작가는 공동의 영토로 사용하던 땅을 사유재산으로 뒤바꾸던 시기, 이 변화를 주도한 이들의 끈질긴 욕망과 진실을 호도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휘둘려 터전을 빼앗긴 나약한 공동체의 삶을 담는다. 함께 사용하던 목장을, 나무를 베던 산을, 모두가 공유하던 천연자원이 담긴 토지를 계몽주의 시대에 중산층으로 등장한 의사, 변호사가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공유지는 더 이상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사용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공공의 자원을 누리면서 모여 살던 공동체는 그들이.. 더보기
불안과 영성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험할 만큼, 오늘의 정보는 오염되었다. 직접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는 정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의심 없이 들은 바를 전한다면, 그 역시 정보의 진위를 교란시키는 데 일조하는 메신저가 되고 만다. 불신이 바닥을 치고 내려가는 지금, 불안은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까. “상황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 희망마저 온전히 잃어버리는 최악의 순간에 사람들은 밀교적인 믿음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오컬트의 예술’을 쓴 작가 S 엘리자베스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천착하는 영성과 신비주의, 음모론의 배경에는 ‘불안’이 있으며, 그 안에는 대안적 권력 구조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바라본다. 그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던 시기에는 사회정의를 재정립하기 위한 운동이 발생했고, .. 더보기
대체 가능한 생명 지난 4일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북부흰코뿔소 ‘나진’이 폐사했다는 소식이 SNS에 퍼졌다. 다음날, 북부흰코뿔소를 관리하고 있는 ‘올 퍼제타 보호구역’은 이 뉴스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렸다. 현재 암컷 두 마리만 남아 있어 ‘기능적 멸종’에 처한 것은 맞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고 설명했다. 유일한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이 죽은 것은 2018년 3월20일이다. 피부 상처, 합병증 등으로 큰 고통을 겪는 고령의 ‘수단’을 지켜보던 이들은 ‘안락사’를 결정했고, 밀렵군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24시간 보호받던 45세의 ‘수단’은 남은 암컷과 인공수정을 할 수 있는 유전물질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리아 데이지 긴스버그의 질문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멸종의 원인을 제공한 인간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기 .. 더보기
기계 속의 유령 음성과 영상을 저장하는 효율적인 장치를 만들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던 연구자들은 테이프를 발명했다. 그 테이프는 기록의 역사에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과거를 구식으로 만들었다. 음악가들은 테이프가 기록하는 거의 모든 소리로부터 리듬, 박자, 음정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전자음악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음악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던 소리도 비로소 음악이 되었다. 잡음과 마모라는 숙명적 한계로 혁신의 왕좌를 차세대 저장장치에 물려준 테이프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 그물망에 가로막혀 볼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 중이다. 테이프가 본연의 기능과 무관하게 오롯이 사물이 되어 바스락거릴 때, 그 옆 공중에 매달린 자루는 바닥으로 ‘퉁’ 떨어지며 주위를 환기한다. 이곳의 사물.. 더보기
‘기정다운’ 아름다움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뮤지션이, 꽤 긴 시간 방황한 끝에 ‘한번뿐인 인생, 나답게 살자’는 답을 찾았다는 말을 전한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 패널은 직장생활 10년이 흐르는 동안, 조직 안에서 점점 나다운 면이 깎여나가는 것을 느낀다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관계 안에서 나답게 사는 일은 왜 쉽지 않을까. ‘기정다운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연 김기정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다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8세 때, 발달장애와 함께 선택적 함구증 진단을 받은 그에게 어머니는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술이 불안장애의 일종인 선택적 함구증을 완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마커로 그림을 그릴 땐 한 줄 한 줄 얇게 칠해나가다 보니.. 더보기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거기를 살살 만져봐요. 보드랍게. 그리고 손을 조금 위로 올려서 오른쪽 무릎 전체 동그란 면을 더듬다보면 다리가 접힌 부분에 생긴 옷 주름 세 개가 있죠? 거기를 선 따라 하나하나 엄지, 검지로 밀면서 살짝 만져봐요. 약간 까슬까슬하죠?” 홍이현숙은 서울 북한산 승가사 108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서 만날 수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목소리로 만져본다. 촉각의 경험은 마치 구전설화처럼, 경험을 간직한 자의 목소리를 따라 다음 사람에게 전해진다. 목소리의 안내를 받으며 5m에 달하는 부처님을 눈으로 만지는 사이, ‘왼쪽 옆구리에 불상을 새긴 채 웅크리고 있는 뿔 잘린 장수풍뎅이바위’는 배경으로 물러서고,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양식이 형식화되고 도식화된 측면을 보여주는 고려시대 초기 불상’이라는 학자들의 연구는.. 더보기
AI 리터러시 나의 불안, 욕망, 의심을 관찰하는 알고리즘은 은밀하게 나의 일상을 구축하고, 나의 미래를 설계한다. 운이 좋다면, 알고리즘의 서비스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다 행복했노라 말하고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AI) 리터러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작가 스테파니 딘킨스는 휴머노이드 AI 로봇 BINA48을 만났다. 테라셈 무브먼트 재단이 2010년 출시한 BINA48은 이 재단이 세운 가설, ‘AI가 대량의 데이터를 다루면, 점차 인간처럼 의식적인 실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개발한 연구물이다. 소수민족의 문화로부터 대화를 시작한 딘킨스와 BINA48은 로봇과 인간의 지속적인 우정, 기술, 인종, 성별, 사회적 형평성, 미래 등을 주제로 토론을 이어나갔다. “사회 특권층이 다.. 더보기
내 어머니에 대해서 말해 줄게 자콜비 새터화이트의 어머니 파트리샤는 평생 팝스타가 되고 싶었다. 그는 곡을 쓰고, 카세트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자신에게 주목해주는 이들도, 작업을 알릴 수 있는 매체도 만나지 못한 채 평생을 보내야만 했다. 비디오, 조각, 3D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 음악 등 장르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역동적인 가상세계를 만들어온 작가 자콜비 새터화이트는 어머니가 창작한 음악, 드로잉 등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등장시켜 기술 자본주의의 현재를 묻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10년간 어머니의 음악을 녹음하면서 또 다른 종류의 협업작업을 구상하던 그는 2016년 어머니를 잃었다. 상심을 뒤로하고, 어머니가 작곡한 노래, 테이프, 그림 등을 바탕으로 기술진, 음악가들과의 본격적인 협업을 거쳐 전시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