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동남아시아 비평사전 a는 고도·무정부주의, b는 버펄로, c는 원·부패, d는 쇠락, e는 전염병·회피, f는 허구·마찰·숲, g는 유령·유령작가, h는 인본주의, i는 정체성, j는 해파리, k는 친족, l은 가독성, m은 만달라, n은 국가, o는 바다, p는 정치, q는 여왕. 싱가포르 작가 호 추 니엔은 라틴 알파벳 26개로 시작하는 단어와, 각 단어로부터 떠올린 텍스트를 동남아시아 관련 5000여개 영상 및 음악과 조합해 ‘동남아시아 비평사전’을 편집했다. 비평사전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26개의 알파벳을 하나씩 클릭하면 관련 키워드, 텍스트를 읽는 내레이션 위로 시청각 자료가 흐른다. 동일한 알파벳을 클릭하더라도 그때마다 내레이션의 문장과 속도가 변하고, 영상과 음악이 변한다. 비평사전의 시스템에 업로드한 원소.. 더보기
무엇이 생필품인가 “무엇이 생필품인가.”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상업시설 외에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던 영국에서는 코로나19 규정에 따라 박물관과 미술관 역시 모두 문을 닫았다. 피트니스클럽, 미용실, 펍 등 몇몇 시설들이 영업을 허가받은 지금도 생필품과 관계없는 업종으로 분류된 미술관, 박물관은 5월19일까지 문을 열 수 없다.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응축된 작품을 서비스하는 전시장은 왜 생필품 유통공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가. 런던디자인미술관과 작가 카미유 왈랄라는 미술관의 아트숍을 ‘생필품 유통의 장’ 팝업 슈퍼마켓으로 바꾸어 문을 열면서 이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창의력은 필수적이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슈퍼마켓에서는 신진 예술가 10명이 디자인한 케이스에 담긴 쌀, 커피, 차, 마스크, 오트밀, 세제, 파스타소스.. 더보기
홀로 있음에 대한 어휘 있다. 숨쉬다. 자다. 꿈꾸다. 깨다. 일어나다. 앉다. 듣다. 보다. 생각하다. 서다. 걷다. 오줌누다. 샤워하다. 옷입다. 마시다. 방귀뀌다. 똥누다. 읽다. 웃다. 요리하다. 냄새맡다. 맛보다. 먹다. 깨끗이 닦다. 쓰다. 몽상하다. 기억하다. 울다. 낮잠자다. 만지다. 느끼다. 신음하다. 즐기다. 부유하다. 사랑하다. 희망하다. 원하다. 노래하다. 춤추다. 떨어지다. 욕하다. 하품하다. 옷을 벗다. 눕다. 여기 우고 론디노네가 선택한 ‘홀로 있음’에 대한 45개의 단어가 있다. 빛의 스펙트럼이 마치 시곗바늘처럼 전시장 천장·벽면·바닥을 타고 시간을 지시할 때, 단어의 뉘앙스와 교감하는 45개의 광대조각은 공간 안에 앉거나 누워 각자의 하루를 보낸다. 동그랗게 붉은 코를 매달고 눈 감은 하얀 마스크.. 더보기
미래를 위한 트레이닝 계획은 불확실해서 희망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지지하는 한편, 불확실해서 두려운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붙잡는다. 미래를 향하는 계획은 현재의 ‘욕망’ 같은 것에서 출발해서 현재의 면면을 전면수정하거나, 지속하거나, 공고히 한다. 미래는 누군가의 예측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지로 결정된다. 2018년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100여개의 신기술을 모아 ‘미래는 여기서 시작된다’는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근미래의 풍경을 상상하는 이 전시는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민주주의는 여전히 작동하는가’ ‘누가 영원히 살고 싶은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미래를 향해 내가 원하는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 현재의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장을 펼쳤다.. 더보기
두려움은 영혼을 먹어 치운다 올해 초 미국 프린스턴 예술위원회는 ‘마틴 루서 킹의 날’과 ‘흑인 역사의 달’을 맞이하여 폴 로브슨 아트센터 옥상에 깃발을 설치했다. 이 깃발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태국·독일·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태국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품 ‘무제 2017(두려움은 영혼을 먹는다)(백기)’로, 작가가 비영리문화단체 ‘크리에이티브 타임’이 기획한 프로젝트 ‘충성의 맹세’ 출품작으로 제작했던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타임은 저항을 상징하는 장소를 점유하는 방법으로 ‘깃발’을 선택해, 예술가 16명에게 싸울 가치가 있다고 믿는 메시지를 담은 깃발 작업을 의뢰했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2011년 선보였던 프로젝트의 제목 ‘두려움은 영혼을 먹는다’를 하얗게 색을 뺀 미국 국기 위에 적어 깃발을 제작했다. 작가는 다.. 더보기
검은 황금, 검은 깃발 1901년 1월10일, 석유 전문가들이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고 보았던 텍사스 스핀들톱에서 두꺼운 메탄가스 기둥이 솟아올랐다. 수년간 반복되는 시추 실패로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이들은, 미국 연간 시추량이 총 83만배럴이던 그 시절에 하루 10만배럴을 뽑아내는 유전을 찾아내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스핀들톱 근처 보몬트로 전국의 투자자, 투기꾼들이 모여들었다. 셀 수 없는 시추탑이 땅 위로 솟았다. 스핀들톱 유전의 수명은 매우 짧았지만, 유전 개발 붐은 미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황금’ 석유가 대표하는 화학에너지에 기대어 살아온 인류가 지금껏 이룩한 문명의 대가는 회복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황폐화된 자연이다. 작가 존 제라드는 개발 광풍이 지나간 후 황무지가 되어버린 땅 스핀들톱에 긴 관을 꽂았다... 더보기
기억 대리자 전시장 한편에 자리 잡고 앉은 안드로이드가 좌중을 향해 고개를 젓고 손짓하며 말하기를, “이 지식이 누구를 위해 보존되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검은 곱슬머리에,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그는 자신을 ‘인간의 음성 저장소’라고 소개하며, 인류 역사상 유명한 연설·영화·책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독백하듯 암송한다. 그는 미래건축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리처드 버크민스터 풀러의 명언들, 과학실험이 만든 기이한 존재에 대한 소설 을 쓴 메리 셸리의 문장들을 재구성하여 기억, 시간, 시작과 끝, 종말 등에 대한 독백을 이어간다. 그의 독백은 고생대, 중생대, 그리스·로마시대, 그리고 동시대를 넘나든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꿈꾸었던 세상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는 존재가 되어, 인간의 뇌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량을 저장.. 더보기
기획자 구글의 온라인 전시 콤팩트 카세트테이프를 발명한 루 오텐스가 별세했다. 발명자의 작고 소식 앞에 음원의 저장과 유통의 역사가 새삼스럽다. 레이디 가가, 블랙 핑크 등 몇몇 뮤지션들이 카세트테이프를 발매하고,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판매량도 꾸준히 증가한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지금이 카세트테이프의 시대가 아니라는 건 다들 안다. 구글과 유튜브가 협력하여 온라인사이트 아트앤드컬처에서 새 전시를 열었다. ‘뮤직, 메이커스 & 머신’이라는 제목으로 전자음악의 역사 속 발명가들, 예술가들, 문화, 기술을 다룬다. 오래전부터 온라인 전시를 개최해 온 구글은 이제 다양한 도구를 능숙하게 활용하여 정보를 가공하고 조직하면서 보기 좋은 전시를 만든다. 방대한 데이터를 운용하는 구글은 오프라인에 기반을 둔 그 어떤 조직보다 막강한 영향력, 기.. 더보기
기술복제 시대의 복제 불가능성 세상이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은 흥미진진한 만큼 두렵다. 현재 안에서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그런 변화를 부정하고 저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최근, 작가 비플의 작품 ‘매일: 첫 5000일’의 결제 수단으로 이더리움 NFT를 채택한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스’의 노아 데이비스가 하는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순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관이든 불가피함에 저항하려고 할 때마다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무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2020년 10월, 온라인에서 무료로 볼 수 있었던 10초짜리 영상 작품을 6만7000달러에 구입했던 한 컬렉터가 내놓은 비플의 작품이, 지난달 25일부터 3월11일까지 진행 중인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더보기
하루의 시작 2012년, 경남도립미술관은 생태계의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취지로 ‘폐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지구의 생태가 안녕하지 않고서야 인간의 평안한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목소리를 시큰둥하게 외면하던 시절, 환경보호보다 우선순위에 올라선 것들이 차고 넘치던 시절, 기획자는 ‘폐허’를 키워드로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려던 이들이 강박적으로 추진해온 근대화의 시간이 조각낸 생태계의 고리를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어쩌면 반성을, 더 나아가 행동의 변화를 희망했을 그 전시에 참여한 구헌주는 생태와 환경 문제가 중요한데도 이를 먼 세상 이야기로만 여기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스프레이를 들고 거리의 골목 담벼락, 건물벽, 셔터문에 그림.. 더보기
입춘대길 새해가 되면, 한국인에게는 목표를 세우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공식적인’ 세 번의 기회가 온다. 한 번은 전 세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1월1일 새벽. 보신각 종이 33번 울려 퍼지는 동안, 각자의 바람을 새기고 실천을 다짐한다. 그러나 곧 마음은 느슨해지고, 언제 그런 결심을 했나 싶게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 나 역시, 점점 게을러지고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제때 식사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은 보름을 채 못 가고 다시 올빼미 생활이 시작되던 차, 지인들이 함께하는 단톡방에 입춘을 알리는 소식이 올라왔다. 2월3일 23시59분48초가 올해의 입춘이라며, 정성스럽게 써넣은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올려놓은 지인은 그 시간에 맞춰 기원하고 입춘첩을 붙이자고 했다. 소원성취를 향한.. 더보기
위상 변환 지수 현실에 몸이 묶여 있는 나는 안녕한가. 극단적으로 발전하는 기술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에 대한 기대와 공포 사이에서, 과잉 대표하는 특정 계층의 경험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질서 안에서, 우리는 다들 좀 지쳐 있는 것이 아닐까. 평행우주를 오가고, 다른 시대 다른 이의 몸으로 빙의하고, 내 삶의 결정적 순간으로 회귀하여 역사를 새로 쓰면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었던 미래를 욕망하는 판타지를 비타민 삼아 하루를 보낸다. 인간의 환각 상태를 과학기술, 예술과의 관계 아래 다루어온 제러미 쇼는, 위기의 상황일수록 새로운 비전을 갈망하는 인류의 바람을 담아,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평행우주’로 탈출하는 작업 ‘위상 변환 지수’를 설치했다. 그것은 초월성을 암시하는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