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우주에 가는 이유 이제 우주는 과거처럼 멀지 않다. 돈과 의지가 있다면 지구의 대기권 밖을 다녀올 수 있다. 문제는 왜 우주에 가느냐일 텐데, 작가 톰 삭스는 “지구를 더 잘 이해하고 지구의 생명체가 얼마나 특별한지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질적인 물질, 맥락, 개념, 브랜드를 ‘혁신’이라는 바늘로 자유분방하게 엮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소비주의를 부드럽게 비트는 톰 삭스는 유머러스함과 진중함을 한 몸에 담고 활약한다. 그가 예술의 대상으로 우주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2007년부터다. 화성에 최초의 여성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아폴로 계획에서 영감을 받은 우주기지, 우주복, 우주선을 비롯하여 우주에서 필요한 도구를 제작했다. 특별한 점은 이 도구를 모두 ‘수제작’했다는 것이다. 가장 혁신적인 기.. 더보기
보이스의 도토리들 ‘사회적 조각’을 창안한 요제프 보이스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열리는 가운데, 영국의 작가 듀오 아크로이드와 하비는 보이스의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잇는 프로젝트를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선보였다. 1982년 카셀시에서 열린 도큐멘타에 맞춰 시작한 7000그루의 나무심기는, 4년 후 사망한 보이스의 뒤를 이은 가족들의 힘으로 마무리되었다. 보이스에게 조각은 예술세계에 갇혀 홀로 존재하는 오브제가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안에서 공진화하는 유기체였다. 그는 나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숲은 사회운동의 현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문화, 경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을 사회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상호 연결시켜나가는 길.. 더보기
식물의 결정 코로나 블루로 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뉴스를 봤다. 홈 가드닝 시장이 급성장 중이라고 한다. 집에서 키우던 화초는 이제 ‘반려식물’이라고 불린다. 식물을 동반자로 인정하는 순간, 식물과 나의 관계는 특별해진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이 생명을 보살펴야 할 의무감이 생긴다고나 할까. 식물에 더 큰 마음과 많은 돈을 쓰도록 유도하는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식물병원은 반려식물이 병들면, 어쩔 줄 모르고 방치하다가 새 식물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보내서 치료하라고 한다. 식물전용호텔은, 혹시 출장 떠난 사이 반려식물이 말라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주인의 불안을 덜어준다. 호텔에 투숙하는 식물은 내가 없어도 최적의 환경에서 건강하게 생활한다. 생명을 보살피는 마음이 우리의 일상을 윤택하게 만든다.. 더보기
지붕과 뿌리 작업의 시간을 서핑에 비유한 작가 쥘 드 발랭쿠르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서핑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 파도를 기다려야 한다. 적절한 파도를 만나면 정확한 타이밍에 파도의 경사면을 타고 올라 균형을 잡고 이동한다. 바다의 신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종교적 제의에서 출발한 원주민 문화는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다리며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바닷가에서 밝고 깨끗한 햇빛을 만끽하며 서핑을 즐기는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그가 구사하는 색은 캘리포니아의 햇빛처럼 선명하다. 그는 서핑을 배우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상적인 조화가 전해주는 감각을 경험했다. 어떤 밑그림도 없이 빈 캔버스에 곧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려나가는 작가는, 바다.. 더보기
국정추묘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옥상에 고양이 가족이 살고 있었다.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뒷집에서 새끼를 낳은 고양이가 집주인에게 쫓겨 우리 집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우리는 새끼가 자라서 스스로 떠날 때까지 그들의 동거를 허락하기로 했다. 검은색, 노란색, 흰색이 모두 섞인 코숏 카오스는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와 한 마리의 치즈태비를 낳았다. 옥상 한쪽을 내어준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새끼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기대 이상이다. 처음에는 사람의 인적이 느껴지면 바로 지붕 밑으로 숨기 바빴던 아이들도 제법 당당하게 옥상을 돌아다닌다. 꽃그늘 아래 앉아 새끼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미 모습이 변상벽의 그림을 빼닮았다 싶어 그림을 뒤적여본다. 산수화 천재가 넘쳐나는 조선의 도화서에서 자괴감에 빠져 있던 변.. 더보기
미로 종교, 정치에 대한 논쟁적인 작품으로 권력자들과 갈등을 빚던 아르헨티나 작가 레온 페라리(1920~2013)는 1976년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독재정권의 억압을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 시기, 아르헨티나에서는 많은 이들이 죽고 실종됐다. 브라질 망명 후, 가톨릭교회와 독재정권의 연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페라리는 권력이 공간을 재편하여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부조리가 삶의 기술인 양 흘러넘치는 사회에서 비정상을 정상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광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판단은 금기에 가깝다. 광기는 공간에 스며들어 사람들을 억압한다. 그는 도시계획 도면의 형식을 빌려 그가 목격하고 있는 도시의 현실을 표현했다. 그가 그리는 도시는 비현실적인 계획, 터무니없는.. 더보기
피로 기원에 대한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과학기술이 미친 속도로 발전하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존재하게 한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는 상상과 사실과 은유와 상징을 버무려 기원에 대한 신비로운 가설을 써내려가고, 과학은 물질세계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며 기원의 실마리에 다가간다. 카미유 앙로는 스미소니언박물관의 아티스트 리서치 펠로십 기간 동안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기록보관소, 국립자연사박물관,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의 소장품을 촬영할 수 있었다. 수집, 보존, 분류 업무에 특화되어 있는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둘러보면서 앙로는 이 자료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고, 가설을 증명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고, 거대한 구조를 짜면서 ‘기원’의 시점을 가시화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폭력.. 더보기
자연스럽게 기록의 목적은 남겨지는 데 있다.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져도 세상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그러나 기록을 살필 때는 남겨놓은 자의 목적과 의도를 헤아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록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상반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살필 때는 기록의 행간, 기록되지 않은 것도 헤아려야 한다. 때때로 정말 중요한 것은 기록되지 않은 세계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패멀라 B 그린은 1873년 태어나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약한 여성 영화감독 알리스 기를 우연히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그러나 영화가 등장한 초창기에 1000여편의 작품을 연출, 제작하면서 영화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 인물에 대한 기록은 영화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가 10년간 영화제작 총.. 더보기
부르카를 두른 해골 “부르카는 존경의 이름으로 통제하는 방법이다. 부르카에 명예, 문화, 종교 같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제 그것은 단지 여성을 통제하고 자기 안에 가두어 두는 수단일 뿐이다.” 여성을 부르카라는 감옥에 가둔 채 복종하고 순종하는 신체로 개조하는 폭력이, 그럴듯한 명분과 사회적 합의하에 21세기에도 강제된다는 현실을 납득하기란 쉽지 않다. 1990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말리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당하는 현실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유학을 떠나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여성이 ‘집 밖’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가족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형제들의 반대로 집 안에 1년 가까이 감금됐다. “집에 있는 동안 나는 다양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나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소녀들이.. 더보기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망할 정치 때문에 그림에는 다들 관심이 없어.” 자신의 노래가 흘러나와도 귀 기울이는 사람 없는 카페에서 가수 클레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오랜만에 와보니 꽤 좋은 걸.” “퇴폐 시는 형편없어.” “피카소의 부엉이는 여자처럼 보여.” “아프리카에 갔을 거야. 인종차별주의자.” 거리를 걷는 그를 힐긋거리는 시선이 따갑게 꽂힌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서로의 시선은 서로에게 압박을 준다. “추하다는 건 죽은 거나 다름없어. 아름답다면, 난 다른 이들보다 살아 있는 거야.” 타인의 시선에 의지해 나를 붙잡는 클레오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각자 자기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사람들의 일상, 그 부서진 대화 사이를 걷는 시간이 불안하다. 암에 걸린 것이 아닐까 의심하던 그는 병원의 최종 진.. 더보기
오래된 논쟁 한 사람이 흰 벽을 향해 망치질을 시작한다. 느리고 무겁게 반복되는 망치질에 벽이 떨어져 나가고, 누런 흙먼지가 우수수 내린다. 흰 벽의 껍데기 안쪽 석조 구조가 드러나면, 다시 벽은 애초의 하얀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망치질이 시작된다. 망치질이 되풀이되지만, 단단한 석벽을 뚫는 장면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석벽이 노출되면 다시 하얀 벽 앞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석조 구조 앞에 멈춰 서기를 반복하는 망치질은 한편 무기력해 보인다. “나는 파괴 없는 건설은 없다고 말해왔다. 나는 예술가들이 단지 그들의 화려한 환상에서 무언가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닌이 말했듯, 목표는 현실보다 더 급진적이다. 시도하라!” 모니카 본비치니는 왜 유리나 벽을 망치로 깨뜨리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작가에게.. 더보기
위기의 일상성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감금 상태를 즐기고 있어.” 아무 계획이나 약속도 없고, 온전히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쓰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는 도마뱀을 향해 다른 도마뱀이 말했다. “격리 1주차에 할 법한 말이네요.” 2020년 3월과 4월, 뉴욕시에 봉쇄령이 떨어진 시기, 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장소에 발이 묶였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 메리엄 베나니와 영화제작자 오리언 바키는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격리의 시간을 도마뱀 두 마리가 펼치는 8개의 에피소드로 제작해 인스타그램에 짧은 비디오로 공개했다. 한 쌍의 파충류는 팬데믹이 전개되는 혼란스러운 현실의 연대기를 지난다. 뉴욕의 영상과 3D애니메이션을 조합하여 제작한 각 3분 분량의 에피소드는 옥상의 아지트, 줌 미팅, 연인과의 데이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