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기계적 두상, 우리시대의 정신 따지고 보면, 예측도 상상도 한 적 없는 미래가 펼쳐진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 어느 시점엔가 예상하거나 제시했던 미래가, 단지 내가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 내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내 삶에 개입할 뿐 아닌가. 현대자동차그룹이 한때는 그룹의 ‘두뇌’로까지 여겨졌던 엔진개발센터를 폐지한 것이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의존하는 인프라 역시 영원할 리 없다는 것을 다들 짐작하고 있다. 삶의 기반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을 살았던 유럽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이입되는 순간을 자주 만난다. 전에 없던 기술이 속속 등장하여 내가 알던 세계를 접어버리는 기분. 기술에 힘입어 성능이 현격하게 향상된 무기가 맹활약한 1차 세계대전으로 정신적·물질적 토대가 무너지는 .. 더보기
범람하고 확장하는 나환 글을 쓰는 일은 늘 미래의 독자를 향하는 법이지만, 새해에 도착 예정인 글을 쓰는 이 순간에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누고 싶어진다. 반성과 각오를 다지고 싶어진다. 돌아보면, 한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유독 많았던 한 해였다. 시대의 종말은 그 시대를 일군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온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죽었다. 달라진 시대의 문법을 거부한 채 자신은 세상의 질서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오만하게 굴었던 이들은 사회적으로 죽어가고 있다. 반성 없는 자들의 근거 없는 당당함도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세상의 패러다임이 변한다는 게 이런 것이로구나 되뇌는 하루하루가 간다. 세상의 변화는 거대한 존재의 한 걸음이 아니라, 역사가 기록하지 않.. 더보기
달콤한 스핑크스 누군가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면, 그것은 나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일까. 여성, 남성, 중성, 비장애인, 장애인, 동양인, 서양인, 흑인, 백인,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자본가, 노동자 혹은 또 다른 다양한 기준으로 정리되는 정체성의 카테고리들을 훑어본다. 분류의 틈새로 치고 들어가 기존의 분류에 의지한 정리를 무화시키는 단어들도 떠올려본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실체는 몇 개의 단어 안에 포섭되지 않는다. 만남의 폭이 넓어지고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몇 개의 단어로 개인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가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우리가 여전히 그 습관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미국 작가 카라 워커의 작업에는 흑인 여성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캘.. 더보기
노래하는 단어들 “우리는 소리를 못 듣는(D.E.A.F) 것일까? 지금 우리 안에 갇혀(C.A.G.E) 있으니. 우리 나이(A.G.E)가 어떻게 되지? 내 얼굴(F.A.C.E)이 제대로 안 보여. 우리 희미해지려나봐(F.A.D.E). 우리 사라지려나봐(F.A.D.E). 우린 표현을 잘해(G.A.B). 그리고 주목받고 싶어 해(B.E.G). 안 좋은(B.A.D) 기억들뿐. 힘든 일도 있었지(F.A.C.E.D). 이제 우린 누워 있어(A.B.E.D). 이젠 유리한 상황이야(A.C.E). 유행일(F.A.D) 뿐이었나? 세상에(E.G.A.D)! 네가 뒷마무리라고 했지(D.A.B). 이 정도면 오래 갇혀 있었어(C.A.G.E.D).” 이 글을 읽으면서 알파벳에 해당하는 음악코드가 지시하는 소리를 떠올려보자. 그 소리는 ‘음악’에.. 더보기
ERC-721 매년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을 선정하는 미술전문잡지 아트리뷰가 올해에는 대체불가토큰(NFT) 발행의 표준 코드인 ERC-721을 1위로,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를 100위로 선정했다. 2002년부터 작가, 예술가, 큐레이터, 비평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미술계 인사들의 1년간 활동을 토대로 결정하는 이 리스트는 그해 미술계 안팎의 이슈를 드러낸다. ERC-721을 1위로 선정한 배경에는 NFT가 문화예술계에 던진 혼돈스럽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2011년 처음 등장한 뒤 다양한 인터넷 밈을 양산했던 ‘니얀 캣(Nyan Cat)’이 올해 초 NFT화되어 온라인 경매에서 300이더리움, 약 6억5000만원에 낙찰된 일은, 디지털 데이터의 소유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더보기
잠시 찬란한 숨 가쁘게 옮겨가는 유행의 물결 위에서 잠시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들을 본다. 유속을 지켜보면 세상의 변화가 빠르다 싶지만, 그것이 일종의 착시라는 것을 안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삶의 근본적인 토대, 세상의 시스템이란 쉽게 변하지 않으므로. “살면서 변화를 체감하기란 쉽지 않지 않나. 하지만 변화는 미세하게라도 일어나고 있다. 결국에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지난 몇 년 동안,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주류의 역사 속에서 소외된 퀴어 커뮤니티의 기억과 경험, 이야기를 아카이빙하고 엮어온 작가 이강승의 말은 다만 어려울 뿐 불가능하지는 않을 ‘변화’를 향한 희망을 붙잡는다. 이강승은 작지만 절실한 변화를 위해 억압의 시간을 극복해 온 이들의 역사를 예술의 언어로 담는데, 연필 드로잉, 금실 자수, 태.. 더보기
환대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구)동숭아트센터 자리에 새로 개관한 예술청 마당으로 레드카펫이 펼쳐졌다. 퍼포머들이 서로 인사하고, 의지하고 두 팔 벌려 포옹하면서 카펫 위를 걷는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움직임을 지지해주고, 한 사람의 걸음을 돕고,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 준다. 퍼포먼스 그룹 ‘뭎’은 11월 문을 연 예술청의 개관을 축하하고, 방문객들에게 환영의 뜻을 전하면서, 이곳에서 이루어질 우연한 마주침과 관계의 순간을 향한 기대감을 레드카펫 위에 올려놓았다. 1989년 문을 열어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국내 최초의 민간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동숭아트센터가 축적한 과거를 헤아리고, 예술가가 주도하는 예술플랫폼이라는 미래를 꿈꾸는 이들을 향한 뭎의 인사는 ‘예술청’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환대의 장소가.. 더보기
즐거움의 불확정성 런던 지하철은 2000년부터 “일상의 공간을 새롭게 상상하고 도시를 경험하는 다른 방식을 제시해 승객의 여정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취지로, 현대미술 작품을 지하철 역사에 설치하는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2020년, 런던 서드베리 타운 지하철역을 대상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루시 매켄지는 지하철 박물관을 비롯하여 교통수단 기록보관소의 자료들을 연구했다. 그는 다양한 자료들 가운데 광고나 안내판에서 사진이 아직 일러스트를 대체하기 전이던 1930년대에, 디자이너들이 광고, 지도, 안내판의 내용을 선택하고 디자인했던 방식이 흥미로웠다. 헤리 페리는 지도 안에 ‘여기는 정말 좋은 펍’ ‘여기는 매우 멋진 폐허’처럼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내용을 적어 넣기도 했다. 매켄지는 사적 .. 더보기
입자와 파동 사이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양자주 작가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몇 해 전, 바로 이 지면에 소개한 적 있는 부산 못골에서의 작품으로 마인크래프트에서 열리는 ‘비트윈 파티클즈 앤 웨이브즈’ 전시에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작가 브래드 다우니와 얀 보만은 마인크래프트 안에 28,000,000×28,000,000×256블록 규모의 가상공간을 만들어 도시의 공공장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작가 9명을 초대했다. 그라피티처럼 도발적이고 선언적으로 공공장소를 접수하는 예술 활동도 있지만, 이곳에서 작품을 구현하는 과정은 대부분 지난하다. ‘미술’을 위한 전시장에 설치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바로 그 장소에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고,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대중.. 더보기
원형보존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과학자의 뇌에 담긴 신비를 파헤치고 싶었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아인슈타인 사망 후 그의 뇌를 훔쳐 보관했다. 사진을 찍고 240조각으로 잘라 살폈지만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세계 과학자들에게 뇌조각을 보내 연구를 제안한다. 신경과학자 메리언 다이아몬드가 그의 뇌에서 일반인보다 신경교세포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처럼 표본이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표본은 효용성을 상실해 무의미하게 폐기된다. 의학박물관에서 1년 동안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1900년대 초반에서 1960년대 사이 제작한 인체 액침표본의 복원과 보존 업무를 담당했던 작가 이소요는, 인체표본에 대한 새로운 각성의 기회를 만난다. 태아의 복부지방 처리 문제를 살피던 그는 관계자.. 더보기
불필요한 빛의 절멸 한 지인이 동양의 옛 그림에서는 왜 그림자를 그리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동양미술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나는 아는 선생님에게 여쭤봤다. 선생님은 동양인은 태양이 만드는 광학의 세계 바깥, 우주를 상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의 동양인들은 태양이 드리우는 빛과 그림자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그림자는 물체의 본질이 아니라 그 반영일 뿐이므로, 굳이 관심을 기울일 이유 또한 없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동양인은 ‘광학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빛이 인도하는 세계의 질서에 푹 빠져 있는 지금의 내 눈과 머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계 바깥을 상상하고 통찰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질서를 다르게 판단한다는 의미이기도.. 더보기
느린 물 물이 느리다면, 그 물은 아마도 무거울 것이다. 물이 느리게 흐른다면, 그 물은 아마도 깊을 것이다. 깊고 느린 물에 뒤섞인 현탁물은 유속에 휩쓸려 정처 없이 떠내려가기보다 서서히 바닥으로 침강할 것이다. 느린 물은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문명이 탄생한 곳에는 늘 물이 있었다. 물의 이미지가 발아시키는 상상은, 물에서 태어나 몸의 70%를 물로 채운 인간의 손끝을 타고 구현됐다. 느리게 흐르는 물길에 의탁해 환경에 반응하고, 법칙을 발견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생활양식을 구축했다. 인위적으로 선택하고 실행하지 않는 한,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대비할 수 있을 만큼 규칙적으로 변했던 과거의 자연환경은, 과거의 인류에게 생존을 지탱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요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