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묵죽의 정신 처음 김진우(1883~1950)의 대나무 작품을 봤을 때 받았던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대나무에는 식물이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좀 더 견고한 금속성의 결기가 담겨 있었다. 작품 자체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에 압도되어 몸을 돌리기 어려웠다. 간결한 표현으로 힘 있게 관객을 매료시키는 작품 앞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술의 힘을 실감했다. “그의 묵죽은 대나무가 아니라 예리하고 강인한 금속제의 도검과 창날, 도끼 등 살상용 병장기를 집합시켜 놓은 듯 삼엄하다”는 최완수 선생의 평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12세의 나이에 항일의병장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근대 서화가 김규진이 개설한 서화교육기관 ‘서화연구회’가 배출한 첫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다. 총칼이 .. 더보기
가까운 미래에서 온 뉴스 피오나 탄, News from the near future, 2003, b&w tinted, stereo, 9분30초 ⓒFiona Tan 태풍이 동반한 폭우가 누군가의 일상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장면을 뉴스로 보았다. 현실감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난영화 속 한 장면처럼 건물이, 자동차가 물에 잠기고 사람이 실종되고 사망한다. 처참한 폐허 앞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의 분노는 방향을 바꿔가며 소용돌이쳤다. 물 빠진 도로 위에 쌓여 있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난폭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재난현장에 대한 뉴스를 보며 네덜란드 작가 피오나 탄의 영상 작품 ‘가까운 미래에서 온 뉴스’가 떠올랐다. 지면에 영상 작품을 소개할 때면, 작품이 이끌고 가는 시간의 호흡을 .. 더보기
알로에틸렌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지층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은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지층을 모색하는 계기도 된다. 코로나로 자가격리 중이던 시기, 지인으로부터 오큘러스 퀘스트를 선물받은 에마 웹스터는, 이 VR 도구 덕분에 물리적 한계에 억눌리지 않고, 입체적인 상상력을 눈앞에 펼쳐볼 수 있었다. 시간의 제약, 재료의 속성, 중력의 무게는 현실에 구현 가능한 형태를 제한한다. 반면, 가상세계 안에 빚어 넣는 입체가 시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은 한없이 유연하다. 현실에는 세울 수 없는 형태의 조형물을 가상의 공간에 배치하는 일은 가볍고 간단하다. 웹스터는 자신의 작업 과정 안으로 오큘러스 퀘스트를 적극 포함시켰다. 그의 스케치, 드로잉을 VR 프로그램을 통해 3차원적 형태로 변형한.. 더보기
가장 바깥쪽 껍질 김예영, ‘김은희, 전가영’, 2022, archival pigment print, 154×228.6㎝ ⓒ김예영. d/p 제공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종종 잊는다. 남이 나처럼 생각하지 않고, 남이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할 리 없으며, 남이 나와 같은 꿈을 꿀 리 없지만, 습관처럼 나를 기준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을 판단하며 하나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 어쩌면 유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 변덕스럽고도 압도적인 흐름에 몸을 싣고 움직이다보면, 그와는 다른, 유행과 무관하게 유지되는 세계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자꾸 잊는다. 그 다름의 세계를 외면한 채, 출처가 어디인지도 불분명한 가치의 세계에 부합하도록 나의 모든 것을 정돈하느라 숨 가쁘거나 우울하다. 그렇게.. 더보기
탄하무. 춤의 시간들 황선정, 탄하무_춤의 시간들, 2022, 단채널 4K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Hwang Sunjeong (사진 제공: 아르코미술관) 균사체의 성장사를 축약해본다면, 그들은 “비결정론적으로 성장”해왔다. 긴 세월을 유연하게 타고 넘은 균사체가 “축적했을 지혜는 이 땅에 인류가 등장하기 전부터 주변의 생명과 공생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유기체와 기술의 유기적 관계, 그들이 구축할 수 있는 새로운 연결망의 에너지와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 황선정은 균사체의 생존방식, 우드와이드웹의 공생관계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지표 아래와 지표 위의 세계를 포괄하는 지구 에코시스템의 확장판을 그린다. 그는 뉴럴렌더링 AI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다양한 형태의 종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상상했다. AI.. 더보기
협업의 모델 버질 아블로가 지난해 11월 희귀암으로 사망하기 전 아블로의 예술세계 전체를 돌아보는 순회전이 시카고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건축학도로 출발, 음악·디자인·패션계를 넘나들며 세상이 구별해 놓은 경계의 목적과 의미를 무화시켰다. 그의 사망 후, 애틀랜타·보스턴·도하 등의 도시를 순회하고 온 전시를 이어받아야 했던 브루클린 미술관은, 아블로의 과거를 회고하기보다 그가 협업자와 꿈꾸었던 창작의 방식들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쪽으로 기획 방향을 선회한다. 브루클린 미술관의 전시를 담당한 앤트원 사전트는, 아블로가 희망했던 공동체 의식을 은유하는 ‘사회적 조각’ 개념을 전시의 핵심에 배치하고, 작품을 벽이 아니라 테이블에 설치했다. 전시 기간 동안 다양한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전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대화의 장으로.. 더보기
달세계 여행 다누리호가 과학장비를 탑재하고 달세계로 출발했다. 고해상도 카메라는 달의 지형정보를 꼼꼼하게 파악하여 2030년 예정하고 있는 한국형 달 탐사선의 착륙 지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섀도 캠은 1년 내내 빛이 들지 않는 영구음영지역을 촬영하면서 물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감마선 분광기는 달 표면의 자원을 분석하여 달 원소 지도를 제작한다. 자기장 측정기는 달의 자기장을 탐색하여 달 자기장 지도를 획득하고 달의 생성 원인을 비롯한 우주환경을 연구한다. 우주 인터넷 검증기는 실시간으로 지구 심우주 통신용 안테나와 교신한다. 광시야 편광 카메라는 달 표면의 입자와 우주선의 영향을 분석한다. 더 많은 탐사선이 달을 탐사할수록 우리는 달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조르주 멜리에스가 쥘 베른의 소설 를 토대.. 더보기
사탄은 없다 공공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선택과 결단이 공공의 이익에서 비껴가는 일은 무수히 많다. ‘공공’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규정하기 어려운 점도 원인이지만, 결정의 내막에 숨겨진 권력자의 이해관계가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기묘하게 비틀어 놓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이란 남부 아바단의 ‘메트로폴 빌딩’이 붕괴하면서 43명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억압의 방식으로 비효율적인 통치를 이어가는 부패한 국가가 부실공사를 무책임하게 방치한 결과,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했다는 현실에 분노하며 무능력한 이들의 기소를 요구했다. 결국 사법부는 아바단 전·현직 시장을 비롯하여 20명을 구속기소했지만, 그에 앞서 시위에 참여한 모하마드 라술로프, 무스타파 알레흐마드, 자파르 파나히 등 이란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을 ‘사회의 안전’을 해친.. 더보기
소리의 틀 강가를 지나 숲길을 구르는 상자 안에는 피아노가 있다. 덜컹거리다 넘어지는 순간은 아찔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워진 피아노는 여전히 거친 길을 구르며 목적지를 향한다. 김영은은 ‘밝은소리 A’에서 한국에 최초로 들어왔던 피아노의 이동 경로를 구현했다.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리처드 사이드 보텀이 대구로 오면서 들여와 한국 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피아노는, 당시 영남지역 물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사문진 나루에 도착한 뒤 대구시 중구 종로에 있는 집까지 사흘에 걸쳐 이동을 마쳤다. 작가는 ‘최초의’ 피아노가 운송되는 과정 위로, 1초간 440Hz의 진동수를 갖는 A(라) 음이 현대 악기 조율을 위한 ‘표준음’으로 자리잡기까지의 역사를 담았다. 다양한 기준을 제치고 단 하나의 기준이 전체를 아우르는.. 더보기
머니코드 잊을 틈 없이 지속적으로 문화예술계, 학계에서 터지는 표절 소식은 창작과 연구의 핵심을 돌아보게 만든다. 왜 연구의 부정행위는 사라지지 않으며, 왜 점점 더 많은 창작자들이 ‘오마주’ ‘패러디’ ‘패스티시’ ‘샘플링’ ‘레퍼런스’ 등의 단어 뒤에 서 있을까. 대중음악계의 표절 뉴스를 따라 유튜브 영상을 돌려보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유사한’ 음악 만들기 풍조에 지쳐갈 때쯤, ‘머니코드(money chords)’라는 단어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서 유명 히트곡에 많이 쓰인다는 이 코드는 시대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단다. 분석해 놓은 내용들을 보니 동일한 코드를 공유하는 유명한 팝송, 가요가 너무 많다. 돈을 벌어다준다는 머니코드.. 더보기
뜨개질의 쓸모 예멘의 고요한 사원에서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이 붉은 실로 뜨개질을 한다. 퍼포머의 몸을 타고 회색 공간을 흐르는 붉은색이 선명하다. 2014년부터 시작된 예멘 내전은 이해관계가 얽힌 강대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확산되며 올해 4월까지만 해도, 멈출 수 있는 시점을 찾지 못했다. 전쟁의 막강한 파괴력과 폭력, 그 공포감에도 무감해질 만큼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예멘인들은 표정을 잊었고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전쟁이 앗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은 어디에 깃드는가. 예멘인들이 묻어버린 감정, 그 심리를 들여다보고자 거리를 촬영하는 나날을 보내던 그는 ‘뜨개질하는 법’을 소개하는 1941년 11월24일자 라이프지의 기사를 발견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방한을 위해 미국 여성들은 손뜨개질로 양말, 목도리, 스웨터를 .. 더보기
에어 컨디셔닝 2006년 7월13일,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병사 납치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육군이 탱크로 레바논을 공격한 이후,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은 본격화된다. 1개월 후 양국은 휴전을 결의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방식대로 전쟁을 이어간다. 이스라엘은 2007년부터 2021년에 이르는 15년간 8231대의 F-35 전투기와 1만3101대의 무인항공기를 레바논 상공에 보냈다. 지상에서는 폭발음처럼 들리는 소닉붐을 일으키는 제트기와 무인항공기, 드론은 레바논을 공포스러운 소음으로 뒤덮었고, 언제라도 폭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일상을 살아야 했던 레바논 주민들은 심장병, 청력 상실, 수면장애 등의 후유증을 피할 수 없었다. 두바이에서 활동하는 로렌스 아부함단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상공 침략 데이터를 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