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예술가에게 허용하는 세계 개막 3일 뒤 카셀 도큐멘타 현장에 도착하니, 반유대주의 논란 한가운데 서 있던 타링 파디의 작품 ‘민중의 정의’는 이미 철거되었다. 작품을 붙잡았을 비계와 지지대만이 어떤 사건의 흔적처럼 남겨져 있었지만, 이 역시 지워지는 중이었다. 2017년, 큐레이터 아담 심칙이 거대한 재정적자를 남겨둔 채 행사를 마무리하여 스캔들에 휩싸였던 카셀 도큐멘타는 인도네시아 출신 예술가 콜렉티브인 루앙루파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도큐멘타의 다음 비전을 모색했다. ‘최초’의 아시안, ‘최초’의 콜렉티브 예술감독이 되어 도큐멘타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간 이들은 ‘유머, 관대함, 독립, 투명성, 재건, 재생’ 같은 가치를 포괄하는 인도네시아의 쌀 헛간 ‘룸붕’을 키워드로, 내용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탈중심’을 지향하며 .. 더보기
유인원 개인의 정보가 돈이 되는 사회에서 나는 나를 보호할 수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인터넷 화면 곳곳에 내 관심사와 닿아 있는 광고가 뜨고, 휴대폰 주위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들은 SNS가 피드 사이사이에 관련 광고를 띄우는 일상에 놀라지도 않는다. 주기적으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만큼 개인정보 보안에 안일해졌고, 주고받는 메시지를 보호하기 위해 엔드 투 엔드 암호화를 적극 사용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의 정보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은 불쾌한 일이지만, 그런 현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인터넷이 우리 삶을 공기처럼 감싸는 사이, 데이터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증가했고, 디지털 진화는 연결의 편리함을 뛰어넘어 데이터 소비, 에너지소비, 감시 자본주의, 딥페이크 같은 사회적 문제를 소환.. 더보기
노동의 싱글 숏 안체 에만, 하룬 파로키, 노동의 싱글 숏, 2011~ 진행 중 ⓒHarun Farocki GbR 침대에 누워 있는 하반신 마비 환자를 도와 휠체어에 앉히는 사람, 소의 발바닥에 편자를 신기는 사람,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사람, 주방에서 양파를 까는 사람, 재봉틀을 닦는 사람,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 쇼핑몰에서 인형탈을 쓰고 호객하는 사람, 인쇄소에서 인쇄물을 살피는 사람, 수술하는 사람, 사제복을 입는 사람, 페디큐어를 하는 사람, 시위대를 저지하는 사람, 죽은 도마뱀을 나르는 개미. 이들은 모두 노동 중이다. 하룬 파로키와 안체 에만은 2011년부터 워크숍 형식의 프로젝트 ‘노동의 싱글 숏’을 시작했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유급, 무급, 유형, 무형, 전통적인 것, 새로운 것 관.. 더보기
15분간의 명성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 문장은 앤디 워홀의 말로 알려졌지만, 다른 이들의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한 덕에 계속 그 유명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이 문장을 최근 본 다큐멘터리 가 상기시켰다.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앤디 워홀은 1985년, 음악전문 케이블TV 채널 MTV와 이 문장을 상기시키는 프로그램 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그는 부자, 유명인, 예술가, 스타 등 ‘명성’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텔레비전 안에 모았다. 이 포스트모던 버라이어티쇼는 워홀이 사망한 1987년까지 약 2년 동안 5회의 에피소드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코트니 러브 등 당시의 화려한 라이징 스타를.. 더보기
운명의 수레바퀴 타로카드 10번 ‘운명의 수레바퀴’를 읽는 열쇳말은 우연, 행운, 윤회·순환, 계절의 변화, 덧없음, 변경 가능성, 위반 등이다. 이 카드는 행운도 불행도 모두 일시적으로 지나가고, 시작은 끝이고 끝이 다시 시작인 것처럼 인생은 순환 속에 작동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 폴란드 국가관 참여 작가 마우고르자타 미르가-타스는 국가관 전면에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타로카드 콜레오니-바글리오니 덱의 도상을 참고하여 ‘운명의 수레바퀴’를 설치했다. 베니스비엔날레 역사상 국가관 대표작가로 초대받은 최초의 롬인(집시) 예술가 미르가-타스는 이탈리아 페라리의 팔라초 시파노이아에 있는 프레스코화를 모티브로 하여 ‘롬인’의 문화 예술 역사를 마치 거대한 달력 내지는 역사서처럼 12개의 대형 직물로 .. 더보기
도청을 지킨 새벽의 전사들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고통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섣불리 이제 그만 잊으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진행형인 역사적 날을 통과하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이름 없는 많은 이의 피에 한없이 감사하게 되는 계절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오늘이 먼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믿고 싶다. 퇴행의 날 안에 멈추어 있는 것만 같은 오늘도, 먼 과거 중 하루로 여겨질 미래의 오늘을 바라본다면, 조금씩 나아져가던 날 가운데 하루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지금을 살고 있는 자들은 지금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할 일이다. 기록을 선택하고 기억을 왜곡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하는 이들의 불순한 욕망 앞에, 기록이 배제하려는 숱한 사람의.. 더보기
매듭 참여 작가 가운데 90%가량을 여성으로 구성한 올해의 베니스비엔날레는 황금사자상, 평생공로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세실리아 비쿠냐를 선정했다. 1948년 칠레에서 태어난 비쿠냐는 작가, 영화제작자, 시인, 활동가 등의 역할을 아우르며 환경 파괴, 인권, 전 지구화 이후의 문화 동질화 현상 등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접근한다. 순수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그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킨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런던으로 유학길에 오른 후 1년이 지난 1973년,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정부가 미국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안고 있는 피노체트 주도의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독재정권의 학살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 수십만 칠레인과 마찬가지로 비쿠냐는 귀국을 .. 더보기
미래학 회의 미래는 거의 인간의 상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상은 발명의 촉매가 되어 현실을 만든다. 그러므로 상상은 미래를 예언한다. 가상인간 로지의 활약상을 보면서,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MZ세대가 선호하는 얼굴형을 모아 3D 합성 기술로 탄생한 외모가 빛나는 로지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기업의 협찬을 받고 광고모델로도 활약한다. AI 음성합성 기술이 만들어준 목소리를 장착한 로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게스트로 출연한다. 로지 외에도 한유아, 루이, 김래아 등의 가상 인간들이 아티스트로, 인플루언서로 온라인 공간을 누빈다. 이제 아리 폴만이 2013년 발표했던 ‘더 콩그레스’가 보여준 세계가 실현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단편소설 ‘미래학 회의’를.. 더보기
화요일 천지창조의 셋째 날, 신은 물을 한곳으로 모아 물과 땅을 나누었다. 바다와 육지가 창조된 이후, 땅은 풀과 나무를 기른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다시 씨를 내리고 또 새로운 생명을 기른다. 비로소 지구 위로 다양한 생명체가 서로 다른 생존의 방식으로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일랜드 출신 어머니와 유모가 들려주는 켈트신화와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를 들으며 성장한 리어노라 캐링턴(1917~2011)은 천지창조의 세 번째 날인 화요일을 상상하며, 아일랜드의 첫 번째 정착민으로 켈트신화에 등장하는 케사르를 떠올렸다. 합리성보다는 환상성이 매혹적인 켈트신화는 자연친화적 세계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안에서 여성성은 자연과 더 깊숙이 관계 맺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여신이 가.. 더보기
비너스와 아도니스 왼손으로 눈을 가린 자의 검은 입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슬픔의 심연으로 그를 조용히 끌어내린다. 종이 위에 툭 떨어진 검은 잉크가 흐리게 번져나가면, 좀처럼 진정할 수 없는 슬픔도 종이 사이로 깊이 스며든다. “앞으로 사랑에는 슬픔이 뒤따르리라. 질투도 동반하리라. 사랑은 처음에는 달콤하나 나중에는 쓰디쓰리라. 변덕스럽고 거짓되고 속임수로 가득하리라. 사랑은 가장 정직하게 보이면서도 사실 가장 위선적이요, 가장 순종적이면서도 사실 가장 고집불통이 되리라. 사랑은 전쟁과 끔찍한 사건들의 원인이 되리라.” 아도니스의 죽음 앞에서사랑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쏟아낸 비너스는 화가 마를렌 뒤마의 손끝에서 그림자처럼 어두운 대신 숨길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을 두른 채 등장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성.. 더보기
사과 사과의 전제조건은,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외부적 상황 때문에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 없이 사과의 제스처를 취한다면, 그런 사과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사과보다 해명이 앞서는 경우 역시, 용서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과오를 저지른 자의 자기변명에 급급한 모습을 지켜봐야 할 이유가 있는 자들은 없건만, 우리는 왜곡된 목적 때문에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사과를 받아야만 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제임스 홍은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이 사과하는 맥락과 방법, 그들의 언어를 관찰했다. 정치적인 사과, 반성하지 않고 태연히 반복하는 잘못, 그 잘못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사과하는 일련의 과정을 정치 사회적 흐름과 연결하여 구성한 영상 작품 ‘사과’를 발표했다. 그 안에서 작가는 특히, 국.. 더보기
그대로 조용히 전시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동시대 삶을 향한 질문과 고민에 접속하기 마련이다. 휘트니비엔날레의 2022년도 전시를 기획한 아드리안 에드워드와 데이비드 브레슬린은,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예술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살펴보는 방법론을 제공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전염병의 창궐과 폭발적인 정치 사회적 갈등이 수면으로 끌어올린 위기의 순간들을 관통하면서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토니 모리슨의 소설 의 첫 문구‘그대로 조용히’를 선택했다. 토니 모리슨이 1970년 발표한 이 소설은 11세 흑인 소녀의 비극을 통해 인종차별과 지배문화의 폭력이 만연하는 사회의 면면을 드러낸다. 사회적 부조리를 맞닥뜨린 이들은, 종종 다양한 이유로 그 사안에 침묵한다. 문화적 규범 안에 안주하면서, 입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