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 예술적 도발에서 쾌락을 누리던 프랑스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의 장례식에서 카트린 드뇌브는 그의 숱한 히트곡 가운데 ‘행복이 사라질까 두려워 행복으로부터 달아난다’를 부르며 망자를 추모했다. 무지개 너머에 좀 더 나은 무언가가 있고, 그 너머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있다며,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불행하기 때문에 가끔은 크게 울부짖고 싶다고 노래한 갱스부르는 인간 욕망의 실체를 알아차린 예술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예술가의 삶을 지탱해준 힘이었다는 제니 홀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선보인 여러 가지 경구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고판에서 빛나던 이 경구는 이후 사람들의 티셔츠에, 연필에, 콘돔 포장지.. 더보기
예술가의 영점 조정 며칠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공성훈의 작가노트를 보았다. “과거에는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술가와 미술대중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가능했지만, 오늘날에는 미술의 역할과 정당성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정의를 내리고 그 결단을 바탕으로 작업을 꾸려나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참으로 오랫동안 영점 조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상에서 한 30㎝쯤 떠서 다닌 것 같던 학창 시절을 지나, 어디에 발을 딛고 서야 할지 막막한 현실로 내려서야 했을 때, 그는 눈앞의 뜬구름을 걷어내고 현실을 비추며 파고드는 길을 선택했다. “땅을 디디고 있는 발바닥의 감각이 고개를 들어 멀리 별을 보게 만드는 근거”가 되기를 바란 화가는 그저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 더보기
[김지연의 미술소환]발견의 회복 왁자한 소음이 공간을 채운다. 한 손에 ‘에페스’ 맥주병을 든 사람들이 ‘맥주 박스 피라미드’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작가 시프리앙 가이야르는 10년 전, 베를린의 전시장 KW에 터키에서 수입한 ‘에페스’ 맥주 7만2000병이 담긴 1만2000개 파란 박스로 6m 높이에 달하는 설치 작품 ‘발견의 회복’을 설치했다. 관객은 박스에서 원하는 만큼 병을 꺼내 마실 수 있다. 술병을 꺼낼 때마다 종이 박스는 비어가고, 피라미드는 머지않아 주저앉을 것이다. 음주를 즐기며 흥을 올릴수록, 그들이 머무는 이 장소는 파괴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실 수 있을까. 과연 언제 박스가 무너질까. 술에 취할수록, 이 술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 더보기
[김지연의 미술소환]객관적 미술은 불가능해 “버니 로저스는 왜 인기가 있을까요?” 동료 큐레이터가 물었다. 주변의 젊은 작가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그 물음에 이끌려 작가의 웹사이트를 뒤적인다. 그의 작업은 대부분 구체적인 사건과 문헌적 근거를 바탕에 두면서도, 새로운 감성을 장착하고 있다. 인터넷의 커뮤니티, 텔레비전 쇼, 뉴스, 예술사, 문학처럼 의지만 있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스 안에 오래 머물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자기의 언어로 정리한다. 작가의 매우 사변적인 선택은 사물과 공간의 세계에 잠들어 있는 정서적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기억, 공동체, 우정, 정서, 정체성 같은 이슈에 닿는다. “나는 왜 내 과거의 것들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어렸을 때 무언가를 사랑했던 것과 .. 더보기
[김지연의 미술소환]눈 없이 보는 세계 “우리가 만약 10개의 눈으로 피사체를 볼 수 있다면, 그 경험은 무엇일까.” 작가 양아치는 렌즈 없이 수치화된 데이터만으로도 3D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치 ‘라이다’로부터, 우리의 시각을 오래도록 지배해온 원근법적 시각체계를 깨뜨릴 수 있는 시점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작가에게 이것은 ‘원근법’으로 상징할 수 있는 서구 근대적 가치관이 구축한 시스템을 폐기하고 다른 관점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주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라이다는 펄스 레이저 신호를 쏜다. 신호가 주변 사물과 부딪힌 후 되돌아오기를 초당 수백만번 반복하면서 축적한 데이터값은 주변 환경에 대한 정확한 실시간 3D지도로 생성된다. 사물의 위치, 운동 방향, 속도도 확인할 수 있다. 데이터로 보는 세계라면, 두 개의 렌.. 더보기
[김지연의 미술소환]창조의 장애물 오른손은 화살촉을 닮은 숟가락으로 귓바퀴에 눈알을 밀어 넣을 기세다. 혹은, 귓속에서 눈알을 떠내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마치, 감각기관이 보고 듣는 것을 의심하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손으로 자신의 언어를 빚어가는 예술가의 초상 같다. 폴란드 출신 작가 스타니슬라브 슈칼스키(1893~1987)는 공식적인 미술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예술가다. 10세에 시카고로 이민 온 뒤, 폴란드와 미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한 그는, 과거의 예술가들이 이룩한 성과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독창적으로 구축한 작업으로 시카고 화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폴란드 정부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살아 있는 예술가라고 칭송하며 개인미술관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포화 속에 거의 모든 작품을 잃어버렸고, 그 후 미술계에.. 더보기
[김지연의 미술소환]당신은 진짜인가 ‘당신은 진짜인가’라는 제목의 웹 기반 아트 프로젝트가 얼마 전 개설됐다. 독일 국제교류처 ifa가 주관하는 이 사이트는 사람·생각·사물·장소를 연결하고 시각화하며, 전시·워크숍·디지털 아트 공간·앱 등 가능한 온라인 소통 형식을 지원하는 교류 플랫폼이다. 교류의 핵심에는 ‘현실’에 대한 질문이 있다. 작가들은 전 세계가 디지털화되어가는 상황이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며, 우리가 지금 보고 경험하는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이 ‘현실’은 언제, 왜 시작되었고 어디에서 끝날 수 있을지 묻는다. 우리의 세계가 시뮬레이션이 아닐 가능성을 10억분의 1의 확률로 진단한 일론 머스크처럼, ‘현실’을 향한 우리의 인식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당신은 진짜인가’에는 에.. 더보기
[김지연의 미술소환]게임의 끝 공간을 반으로 가르는 네트를 넘어온 공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소년은, 붉은 테니스 코트 위에 대자로 쓰러져 있다. 라켓도 그의 손을 벗어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 게임의 시간, 공과 상대 선수에게 시선을 맞추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그는 코트를 벗어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패자’의 네트 너머 테니스 코트 한쪽 구석에 등 돌린 채 서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본다. 그의 건장한 몸 앞에 서보니, 쓰러진 소년의 왜소한 체구가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살짝 숙인 ‘승자’는 1969년이라고 쓰인 우승 트로피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고 있다. 어디로 향한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에서 승리의 충만감은 읽을 수 없다. “승자가 패자보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듀오 작가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이 작품 ‘짧은 이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