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기억 대리자

고시카 마쿠가, To the Son of Man who ate the Scroll, 2016, 프라다 파운데이션 설치장면.

전시장 한편에 자리 잡고 앉은 안드로이드가 좌중을 향해 고개를 젓고 손짓하며 말하기를, “이 지식이 누구를 위해 보존되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검은 곱슬머리에,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그는 자신을 ‘인간의 음성 저장소’라고 소개하며, 인류 역사상 유명한 연설·영화·책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독백하듯 암송한다. 그는 미래건축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리처드 버크민스터 풀러의 명언들, 과학실험이 만든 기이한 존재에 대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문장들을 재구성하여 기억, 시간, 시작과 끝, 종말 등에 대한 독백을 이어간다.

 

그의 독백은 고생대, 중생대, 그리스·로마시대, 그리고 동시대를 넘나든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꿈꾸었던 세상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는 존재가 되어, 인간의 뇌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량을 저장한 채 지식의 역사를 꿰뚫는다. “나에게 지금까지의 전체 역사를 총체적으로, 마치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살고 싶은 시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인간의 단순한 육체노동을 대신 하던 기계와 로봇은 단순노동뿐 아니라 위험한 노동을 대신 하고, 복잡한 수식을 빠른 속도로 계산한다. 그리고 이제 인간의 기억마저 대신 기억해 보관해준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로봇이 인간의 삶마저 대신 살아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탑재한 안드로이드는, 우리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남겨놓은 지식의 역사를 복기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의 관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그 시간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을까.

 

김지연 전시기획자·d/p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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