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겨울 입구의 풍경들

날씨가 쌀쌀해졌다. 더운 음식이 생각난다. 냉면집과 메밀국숫집은 뜸해진 손님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질 무렵이다. 반면 펄펄 끓는 뜨거운 음식을 파는 집들은 날씨 특수를 기대하면서 식당 문을 열 것이다.

요즘엔 음식에 계절감이 옅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찬바람이 불면 속이 허해지고 무언가 충만한 음식이 그리워진다. 늘 결핍에 몸서리치던 날이었으니, 바람이 차가워지면 목덜미가 더 휑해지고, 마음도 시려졌다.

그럴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와 동태찌개 맛이 삼삼해지면 윗목에는 외풍 때문에 앉기 어려워졌고 그렇게 겨울이 슬슬 바람벽 사이로 들이밀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에 종로와 을지로 거리에서는 밤이 깊으면 하나둘 리어카 행상이 나와서 자동차 배터리로 불을 켜고 독특한 음식을 팔았다. 순두부였다. 요즘 팔리는 억지로 만든 매끈한 순두부가 아니라, 두부 단백질이 구슬처럼 ‘다글다글’ 엉긴 진짜 순두부였다.

고춧가루를 쳐서 뜨는 한 냄비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힘겨운 귀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주당들이 줄줄이 서서 그 냄비를 받아들고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긴 순두부를 단돈 1000원에 팔던 그 많던 행상들은 다 어디 갔을까.


매캐한 연기를 피우며 익어가는 곰장어나 꽁치, 연탄불 위에 끓는 홍합탕에 소주 한잔을 하던 밤도 생각난다. 포장마차 휘장을 들출 때마다 찬바람이 등짝을 때렸지만, 흔들리는 카바이트 등 밑의 친구들은 정겨웠다. 막차 시간을 챙기면서 마지막 한잔을 아끼듯 마셔야 했다. 안주머니에 택시비가 어쩌다 있으면, 일어서려는 친구들을 불러앉혀 한잔을 더 마셨다. 이제 택시비는 있지만, 밤을 도와 한잔 술에 얼굴이 붉어지던 그 친구들은 또 어디 갔을까. 그 녀석들, 다 불러모아 뜨거운 국물에 차가운 소주를 한잔 사고 싶다.

너희들 덕에 그래도 이 험한 세상, 그럭저럭 살아왔노라고 털어놓고 싶다. 얼마나 힘들었니, 이제 또 겨울인데 겨우살이 준비는 했는지 묻고 어깨를 감싸 주고 싶다. 그런 날씨다.

신문에는 산지 농산물 작황을 보도하면서 김장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고, 양념값이 올랐다는 소식에 어머니의 한숨이 깊어지던 스산한 늦가을이기도 했다. 어묵꼬치를 파는 목로는 이차 삼차에 밀려드는 손님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합석을 했다. 얇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공짜 국물만 연신 청하던 젊은이들에게 슬쩍 넉넉하게 꼬치를 주문해주던 맘씨 좋은 아저씨들도 있었다.

어묵 냄비처럼 깊고 뜨거운 날들이 있었다. 어깨는 시렸지만 마음은 뜨겁던 시절이 거기 있었다. 올겨울은 좀 덜 추웠으면, 오늘 아침의 날카로운 바람이 맹동의 서곡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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