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제주 순대의 맛

제주도의 음식을 거론할 때 돼지가 빠지지 않는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오키나와와 폴리네시아 지역을 포괄하는 태평양 문화권의 영향이라고 한다. 이제는 먹을 수 없지만 집집마다 기르는 이른바 ‘똥돼지’라는 특유의 토종 돼지는 제주의 상징이었다. 작고 단단한 몸집의 이 돼지와 유사한 것들이 폴리네시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돼지를 잡는 건 제주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다. 결혼하면 신부·신랑집에서 각기 사흘간 잔치를 하는데, 돼지 잡는 것이 핵심이다. 제주에서는 도감이라고 하여 돼지고기를 썰고 나누는 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노련한 도감을 기용하는 것이 잔치의 핵심이라고 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영화 <피와 뼈>는 일본에 정착한 제주 출신 인사의 일대기를 다룬다. 여기서 돼지 잡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김준평은 돼지 배를 가름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인한다. 이어지는 장면이 내게 흥미로웠는데, 아낙네들이 모두 모여 받은 돼지 피로 순대를 만드는 신이었다. 이런 장면은 제주 출신들에게 아주 자연스럽다. 지금도 마을마다 직접 돼지를 잡고 순대를 만드는 곳이 있다고 한다. 돼지는 제주지역 공동체 문화를 이어가는 하나의 단단한 끈 같다. 제주 순대는 ‘뭍’에서 파는 것과 사뭇 다르다. 인공 창자는 쓰지 않고, 돼지의 대창에 내용물을 채워 넣어 우선 크기가 아주 크다. 속도 다르다. 당면은 쓰지 않고 메밀과 돼지피, 부추와 파 같은 양념을 넉넉히 넣는 것이 핵심이다. 한 점 먹으면 입안에 꽉 차는 물리적 감각과 함께 진한 피와 양념의 공세가 이어진다.

제주시 최대 시장인 동문시장 내에 손으로 옛날 순대를 만들어 파는 집이 있다. 식당의 업력은 육십년을 헤아리고, 지금 도마와 가마솥을 맡고 있는 주인 할머니만 해도 사십년 넘게 일했다. 그이와 식구들은 투박하고 굵직한 순대를 만들어 쓱쓱 썰어서 낸다. 제주 순대의 역사는 고려조 몽골의 제주 강점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순대는 말려서 보관할 수 있는 대표적인 휴대 음식으로, 몽골 같은 유목민족의 전통음식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여러 순대도 그렇게 생겼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순대는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넉넉한 포만을 준다.


서양의 순대는 프랑스의 부댕 느와르가 있고, 이탈리아의 살라미도 거론된다. 그러나 우리 순대처럼 싸고 만만한 음식은 아니다. 어려서 엄마 치마꼬리를 잡고 시장에 가면 한 가지 기대가 있었다. 장을 보고 엄마의 단골집에서 순대 몇 점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우거지로 끓인 탕이 공짜로 나오고, 숭덩숭덩 썰어 고춧가루 섞인 소금에 찍어 먹는 순대가 매우 맛있었다. 간과 귀도 곁들여 나오고 간혹 염통도 한 점 씹었다. 고기를 먹기 어려웠던 시절, 순대가 없었으면 무엇으로 우리의 간절한 기름기 열망을 채울 수 있었겠는가. 순대는 가장 적은 돈으로 기름지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절대 음식’이었다. 재래시장이 몰락해가는 와중에도 시장 안 순댓집은 여전히 인기가 있다. 아직 가을볕에 뜨거운 제주에서 시장 구경을 하다가 먹은 한 그릇의 순대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슬라이드처럼 스쳐 지나갔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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