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뽀얀 국물’에 빠지다

영화 <변호인> 덕인지 서울에 돼지국밥집이 생겨나고 있다. 부산과 경남 출향 인사들의 기대 수준에는 못 미칠지 모르나, 그래도 서울에서 돼지국밥이라니, 반가운 일이다. 어떤 식당에는 ‘부산식 순대국밥(돼지국밥)’이라고 써놓았다. 아직 역부족(?)인 걸까. 어쨌든 가히 ‘뽀얀 국물’의 전성기다.

이 국물을 보고 있으면, 몇 가지 일관된 그림이 그려진다. 설렁탕-순대국밥-돼지국밥-고기국수-나가사키짬뽕이다. 서울이 원조인 설렁탕부터 남쪽으로 가면서 뽀얀 국물의 굵은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남한에서 순대국밥은 경기도, 충청도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제주도로 가면 고기국수다. 전후에 미국산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생겨난 일종의 변종 음식이다. 이 국수는 요즘 올레 바람을 타고 제주의 한 상징음식처럼 되었다. 심지어 지역에서 알음알음으로 먹던 음식이 큰 유행을 타면서 현지에서는 원조논쟁과 소송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큰 인기를 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가사키짬뽕은 일본에서 개발된 음식인데,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일본식 선술집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다. 돼지뼈를 푹 고아 뽀얗게 만들어 면을 넣어 먹는다. 일면 고기국수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역사가 깊다. 일본 나가사키 개항기인 19세기 말에 중국인 요리사가 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이 요리는 아주 인기가 있어서, 심지어 인스턴트 라면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뽀얀 국물을 좋아했던 것일까. 전문가들은 일종의 식보(食補) 심리를 든다. 변변한 약이 없던 시절, 음식으로 보하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였다. 특히 뼈를 우려낸 뽀얀 국물은 보기만 해도 살을 찌우고 우리 뼈대를 튼튼하게 해줄 것 같은 믿음을 주었다. 오랫동안 굳건한 황소와 하다못해 돼지의 뼈도 우리의 고단한 식생활에서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뼈를 숭배해왔다. 가족이 아프거나 허해지면 어머니는 뼈를 사들였다. 사골이 아니면 하다못해 잡뼈라도 달여서 가족들을 먹였다. 아내가 장기간 출타를 위해 사골국을 끓이면 집에서 세 끼 밥을 먹는 직장 없는 가장들은 슬퍼진다고 하는 유머도 있지만 말이다. 소 사골을 먹을 수 없는 집들은 감자탕이라도 먹었다. 돼지 등뼈를 우린 국물에 싼 감자를 넣고 만든 이 요리는 비교적 요식(料食)의 역사가 짧은 현대식 요리다. 등뼈에 붙은 살을 뜯고 뼈를 쪽쪽 빨면서 우리는 고단한 고도 경제성장기인 1980~1990년대를 거쳐왔다.

재미있는 건 서양인들도 이 뼈 우린 국물을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뼈를 우리고 수프를 만들어 먹었다. 점차 영양이 개선되고 먹을거리가 늘면서 이 수프는 ‘소스’로 변했다. 스테이크 같은 고기 요리를 찍어 먹는 소스는 결국 뽀얀 국물을 더 졸여서 얻은 일종의 젤리다.

보양 음식이 고급화되면서 홍삼과 비타민 같은 제품들이 잘 팔리고, 소뼈가 덜 팔린다고 한다. 우족탕은 비싸 힘들어도 사골잡뼈탕을 한 솥 끓이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 그것도 한우로 말이다. 더운 여름을 났으니, 몸이 허해질 때이기도 하고.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배달앱  (0) 2014.09.25
가을 꽃게  (0) 2014.09.10
수도의 행보 ‘시커먼 빵 한 조각’  (0) 2014.08.14
사라지는 중국요리 산증인들  (0) 2014.08.07
김칫값 받습니다  (0) 201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