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사라지는 중국요리 산증인들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우리 외식(外食)사, 요리사에서 중국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노인부터 이삼십대 청년까지 젓가락 가지런히 탁자에 올려놓고 그 검은 국수 한 그릇 기다리던 추억이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고종사촌형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짜장면이 나왔던 기억(얼마나 별나고 귀한 음식이었으면)부터 첫 번째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외상 짜장면을 먹었던 서울역전의 중국집까지 찬란한(?) 개인사에서 춘장 냄새가 난다. 창피한 얘기지만 고등학교 시절 친구랑 짜장면 많이 먹기 내기를 하다가 두 그릇 반째에 기어이 구토를 해서 패하고만 쓰라린 ‘흑역사’도 있다.

우리 사회사에서 중국음식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특유의 철가방이 민속박물관에 소장되고, 인천의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 박물관’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짜장면 맛을 내는 라면이 불티나게 팔리고(그 초기 시엠송은 지금도 그대로 쓰일 정도), 짜장면이나 짬뽕이냐를 놓고 절대 고뇌에 빠진 우리들의 추억도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임오군란 이후 개항 바람에 따라 청국인들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중국식당의 역사는 꽤 장구하다. 일제강점기에 최고급 요리점으로 청요릿집이 등장하기 전에 호떡과 빵을 팔면서 시작했던 중국식당은 전후 대중화의 길을 걸으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분식장려와 짜장면값 동결이라는 당국의 엇갈린 통제 속에서 중국식당(그래, 우리에겐 중국집이라는 말이 더 친근하다)은 불같이 번져 갔다.

그러나 수많은 외국식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누리던 외식업의 왕자 중국식당의 몰락은 지금 피하기 어려워보인다. 유행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고, 저가 배달시장으로 들어간 중국식당의 현재는 그만큼 위태롭다. 중국식당의 근간이던 화교들은 화덕을 떠났다. 새로운 젊은 화교 세대가 웍(볶는 솥)과 국자를 잡는 경우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힘들고 돈벌이도 시원치 않은 주방 일을 기피한 지 오래다.


근대부터 지금까지 중국요리처럼 이 땅에서 거대한 영향을 끼친 외래음식은 없을 것이다. 피자와 햄버거도 검은 짜장 소스 앞에서는 새카만 후배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사에 깊은 인상을 남긴 화교 중국식당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없는 듯하다. 심지어 짜장의 변천사조차 정확한 기록과 연구가 얕으며, 짬뽕은 흔히 알려진 대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온 것인지 산둥의 초마면(炒碼麵)이 시조인지조차 모른다.

주변에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은퇴한 노주사(老廚師 주방장)들이 있다. 그들의 화려하면서도 고단한 주방 역사는 듣다보면 한 편의 드라마가 연상된다. 더 늦기 전에 나라도 나서 그 기록을 모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일개인의 호사 취미 정도로 대한민국 중화요리사의 거대한 편년체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 관이든 민간이든 이 일에 나설 필요가 절실하다. 오래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이든 주방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그들이 털어놓는 차진 반죽 같은 오래된 이야기를 기록해두어야 할 시간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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