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열차집

오래된 우리 식당들의 공통점 중에는 특이한 ‘상호’가 있다. 듣기만 해도 정감이 가고 기억하기 쉬운 작명이다. 육교집, 골목집, 세번째집처럼 위치를 뜻하는 것이 있고 주인의 고향을 따서 용인집, 전주집, 부산집도 있다. 가게의 특징을 보여주는 집도 많다. 종로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던 열차집도 그렇다. 집과 집 추녀 사이의 기다란 공간에서 장사를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은 대개 주인의 작명이 아니다. 단골들이 자신들의 편의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입말의 맛을 보여준다. 철학적 깊이와 유식한 내력을 가진 작명도 좋으나, 이렇게 민중의 말로 지은 집들은 오래도록 살아남게 마련이다. 손님들이 이름을 지어 붙인다는 건 애정의 척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 초년 시절이던 20여년 전 광화문 종로 일대의 술집 순례를 처음 배웠다. 무교동에서 매운 낙지에 일차 하고 종로 뒷골목(이곳이 나중에 크게 입말에 오른 피맛골이다)에서 열차집이나 청일집에서 빈대떡을 먹고는 끝내 청진옥에서 해장국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다 가다 보면 늘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간혹 얼굴만 아는 어른들이 있어도 술잔 드는 고개가 은근히 옆으로 꺾어지던 때였다. 근자에 허망해진 피맛골을 멀리 두고 종로 뒤쪽 공평동길을 걸어오르는데 낯익은 상호가 있다. 열차집이라니. 서울 시내를 떠나서 강남에서 주로 벌어먹고 사는 바람에 잊고 있던 그 열차집이었다.

기억을 복기하니, 피맛골 재개발로 노포 여럿이 터전을 잃고 부유한다는 소식이 있었더랬다. 그 가게가 이렇게 건재하여 간판을 걸고 있으니 반가울밖에. 여전히 빈대떡은 맛있었고 눈에 익은 직원들도 보였다. 노포의 특징 중의 하나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장기근속자’가 이 가게에도 있던 것이었다. 의미 있는 건 청년 일꾼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객 맞이에 열심인 그가 다음 대를 잇는 윤상건씨(40)다.

열차집은 1956년 번철 하나 놓고 빈대떡을 구우면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광화문과 종로의 역사를 이고 있다. 교보빌딩이 들어서기 전 여관과 빈대떡 파는 집들이 이 일대를 채웠다. 복개하기 전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윤씨도 교보빌딩 뒤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집의 아들로 자라났다. 열차집 한 귀퉁이에는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옛 광화문사거리 골목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어린 시절의 윤씨다.

공간은 시간이 중첩하여 쌓이면서 압축적인 서사를 보여주게 되는데,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이다. 윤씨의 등장(?)으로 이제 열차집은 이 노포가 이고 온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갈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돼지기름으로 지져서 고소하기 이를 데 없고, 굴값이 비싸든 말든 넉넉한 인심의 맛있는 어리굴젓 반찬도 여전하다. 달라진 것이라곤 팔도 이름난 막걸리 구색이 생겼다는 정도다. 윤씨가 따르는 막걸리 한 잔에 아쉬운 종로의 역사가 다시 살아날 것 같은 기대감이 슬슬 생겨난다. 오랜만에 옛 친구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열차집이 아직도 있다 야.” 주말 낮술 약속이 잡혔다. 장맛비라도 오면 더 운치 있는 나들이가 될 것 같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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