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은 훈훈하고 땃땃하였다. 추어탕을 끓이는 솥뚜껑을 열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김, 석쇠에서 뻐지짓뻐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북어며 빈대떡…. 이 너저분하게 늘어놓인 안주 탁자, 김 첨지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현진건(1900~1943)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의 한 장면이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늘따라 운수가 좋았다. 승객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덕분에 앓아누운 아내가 사흘을 조른 ‘설렁탕 국물’ 한 그릇을 마련하고도 남을 만큼 주머니가 찼다. 허기가 질 대로 진 김 첨지는 선술집에 들러 되는 대로 요깃거리를 골라잡았다. “배고픈 이는 우선 분량 많은 빈대떡 두 개를 쪼이기로 하고 추어탕을 한 그릇 청하였다.” 김 첨지는 허겁지겁 빈대떡을 먹어치운 뒤, 추어탕 한 그릇을 순식간에 물같이 들이켰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석쇠에 얹어 구운 떡은 ‘쭝덕쭝덕 썰어’ 먹어 치웠다. 요기를 마친 김 첨지는 잊지 않고 설렁탕을 사 들고 귀가한다. 하나 아내는 주검인 채였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 첨지는 오열하지만, 이제 설렁탕 따위 무슨 소용인가.
한 세기 전 일당 노동자가 들를 만한 요식업소의 물목을 살핀다. 노동자의 막걸리란 참으로 내력이 깊은 술 겸 음료다. 추어탕·빈대떡·북어는 세기를 넘어 끼니·안주·반찬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때만 해도 고추장과 고춧가루 양념을 뒤집어쓸 일이 별로 없었던 제육은, 제육볶음과 두루치기에 이르러 붉디붉어졌다. 간장과 손잡고는 돼지불고기 및 ‘돼지불백’ 차림으로 재구성되었다. 해방 전후 가정과, 가사과 선생님들의 궁중음식 운운과는 다르게, 너비아니는 선술집에서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간이나 콩팥 등은 점점 덜 먹는 추세다. 대중의 선호는 정육으로 완전히 방향이 바뀌었다. 석쇠구이 흰떡은 오늘날 떡꼬치, 떡볶이에 그 흔적을 남긴 셈이다. 설렁탕은 어떨까. 1920년대 조선어 언론에 따르면 “외국은 고사하고 우리 조선에서도 어떤 지방에서든지 볼 수 없는 경성의 특산물”(조선일보, 1926년 4월21일자)이고, “뿔만 빼놓고는 소고기란 모조리 휩쓸어 집어넣고 끓이는 국”이었다(동아일보, 1926년 8월24일자).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수정증보판, 1940)은 “쇠머리·족·내장들을 백숙으로 끓이어 파는 국. 소금을 타서 먹는다”라는 문장으로 설렁탕을 정의했다. 사전이 ‘파는 국’이란 말까지 붙여야 할 만큼 설렁탕은 요식의 정체와 특성이 분명한 서울 음식이었다. 여기다 기름지다, 누리다, 쇠털내 난다, 뚝배기는 지저분해도 뚝배기에 담긴 모습이 식욕을 자극한다는 매체의 서사가 따라왔다. 그 설렁탕도 변했다. 설렁탕은 전국 음식이 됐다. 또한 기름 잘 걷고, 쇠털내 같은 누린내를 제압해야 할 음식이 됐다. ‘뿔 빼놓고 모조리’가 아니다. 그 바탕 또한 말끔한 뼈와 정육으로 기울고 있다. 한 세기, 그 이름은 이어져도 그 세목의 추이는 복잡하기만 하다. 감히 이루 다 아는 체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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