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통의 공간을 배우는 시간 ‘생일’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는 어린 아들을 잃은 콘스탄스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리게 하고, 아이의 모습으로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아이의 죽음은 공간을 채운다. 고통은 그렇게 공간에 남는다. 


셰익스피어는 1596년 아들 햄닛을 잃는다. 햄닛은 열 한 살이었다. 그런 점에서, 콘스탄스의 독백은 셰익스피어의 고백이기도 하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은 아이의 방을 채운다. 아이가 남긴 모든 것,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이 다 고통의 원인이 된다. 환각과 같은 상상 속에서, 아이가 없는 방 안에 떠오른 아이는 여전히 웃고, 떠들고, 천진했으리라. 사라진 건 아이의 몸일 뿐, 아이에 대한 기억은 더 또렷해질 테니.


영화 <생일>의 한 장면.


슬픔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런데, 고통은 공간을 채운다. 콘스탄스 아들의 방처럼, 셰익스피어 아들의 방처럼, 함께한 공간이 이내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렇게 가득 찬 슬픔이 고통이 된다. 슬픔을 뜻하는 영어 그리프(grief)는 중세 영어 gref에서 왔다고 한다. 그레프는 무겁다는 의미이다. 슬픔은, 그러니까, 무거운 것이다. 한국어에서도 슬픔은 무거움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Pieta)는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를 안고 있다. 마리아는 죽은 아들 그리스도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마리아가 들고 있는 무게는 아들의 죽음, 그 고통의 무게이다. 수많은 영화 작품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가 죽고 나면 그 시신을 들고 오열하는 인물들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주검을 드는 것, 그건 어쩌면 고통의 무게에 대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슬픔의 무게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통이야 어떨까? 고통 역시 주관적이다. 소설가 김애란의 표현처럼 고통은 단수이다. 


영화 <생일>은 그런 의미에서 고통에 대한 영화이다. 부부가 아이를 잃는다.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해외 구류 중이었기에 아이를 잃는 그 순간 부재중이었다. 아이의 죽음을 홀로 감내했던 엄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돌아온 아버지가, 남편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달라져 있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도 각자 다르다. 


이미 알려져 있지만 <생일>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한 가정의 이야기이다. <생일>이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의 죽음을 한 가정의 고통 안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통 밖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안을 들여다보고자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슬픔이 엄마를 어떻게 힘들게 했는지 그것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세월호 그리고 그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보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로 더 깊은 울림을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일>은 아이의 죽음이 얼마나 삶을 바꾸는지를 주목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의 무게를 견디고 그것을 삶의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고민도 담고 있다. 같이 힘들어하던 사람들도 사고가 전염이라도 되는 듯이 냉랭해져 간다. 우리의 슬픔이었던 것이 점차 그들의 슬픔, 엄마의 고통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엄마의 고통은 여전히 아들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게다가 순남(전도연), 엄마는 이제껏 어떻게 고통을 삶 속에서 지고 가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슬픔도 배워야 하고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도 사실 배워야 하지만 막상 누구도,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의 엄마 순남은 자꾸 눕는다. 마루 소파에, 마루에 깔아 둔 이불에 기대어 눕는다. 똑바로 서 있거나 앉아 있기에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기대야만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다. 사소한 기억으로 가득 찬 일상이 더 힘들다. 가족의 죽음, 아들의 부재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이가 막상 살아 있을 땐, 인지되지도 않던 것들이 아들이 사라지자 감지되고, 인식된다. 


아이가 사라진 공간을 채우는 것, 그게 바로 슬픔이며 고통이다. 영화 속 아들의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은 그러므로 슬픔의 방이며 고통의 방이다. 엄마 순남은 그 방에 가서 새로 사온 아이의 옷을 옷걸이에 새롭게 걸어 주고, 이불도 뽀송하게 빨아주며 하루의 일과를 나누기도 한다. 순간순간 오작동하는 현관 센서등은 엄마에게는 영혼으로나마 귀환할 아이의 소중한 신호이다. 순남은 그렇게 아이를 붙잡는 게 아니라 그렇게 고통을 배우는 중이다. 


하지만 <생일>은 고통의 무게를 견디며 조금씩 슬픔을 배워 거기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격렬하게 울고, 서로 다툴 때, 순남과 그의 남편 그리고 딸은 가장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시끄러운 것이다. 조용히 기대어 누워 있던 순남이 일어나 딸에게 화를 내고, 남편을 몰아칠 때 오히려 순남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 <래빗 홀>에는 “사고는 전염되지 않아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 <생일>은 관객에게 사고의 위험을 경고하거나 슬픔을 전염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함께 기억하자는 것일 뿐. 고통을 생각하고, 고통을 짊어지고도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 슬픔 속에서도 살아가는 삶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 테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