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방탄소년단의 새 앨범 <맵 오브 더 솔(Map of the Soul)>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앨범 제목인 ‘맵 오브 더 솔’도 이미 충분히 시적이지만 페르소나라는 부제는 무척이나 인문학적이다. 페르소나는 원래 연극 용어로 가면과 탈을 의미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런 인격을 가리켜 페르소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강한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면이지만 때론 무척 피곤하고 고단한 게 가면을 쓴 삶이기도 하다.
유튜브 최단기간 1억뷰를 달성했다고 화제가 된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뮤직비디오는 고전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에 대한 오마주를 아끼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뮤지컬 전성기에 제작된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려 60여년 전인 1954년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성공에 대한 풋풋한 열망과 사랑의 힘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이 현재성은 오마주와 패러디를 통해 연장된 생명력이다. 끊임없이 현재적인 작품에 소환됨으로써 고전은 박제가 아닌 현재로 살아난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한 장면.
삶의 방식들은 달라져도 삶의 속내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삶이 완전히 달라질 줄 알았다. 스마트폰을 모두 하나씩 손에 쥘 때도 그랬다. 삶의 방식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좌절하고 아픈 삶의 구석구석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방식은 달라진다 해도 삶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그대로이다. 고전을 읽고, 보는 이유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하게 희로애락의 뼈대가 상당히 깊이 있게 다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을 괴롭히고 즐겁게 하는 일들이란 생각보다 무척 단순하고 명백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내러티브 플랫폼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넷플릭스의 이야기들도 가만 보면 무척이나 고전적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너의 모든 것(you)>은 배경이 서점이고 등장인물이 서점 주인과 작가라서 더욱 그렇겠지만 무척 많은 고전문학 작품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매력적이지만 무서운 이면을 지닌 남자는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을 떠올리게 한다. 시체가 있는 비밀의 방이라는 상상력은 더욱 닮아 있다. 실제 드라마 10편째 에피소드의 제목은 ‘푸른 수염의 성’이기도 하다. 상대를 파괴하고라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랑의 방식은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의 집착을 생각하게 한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친구에게 <폭풍의 언덕> 초판 양장본을 선물하기도 한다. 고전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드라마 <너의 모든 것>에 새로운 형태로 재현되어 있는 것이다.
케이블 채널 쇼타임(Showtime)이 제작한 드라마 <홈랜드>는 어떤 점에서 트로이의 목마 신화로 읽힌다. 선물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내부로 침입한 첩자였던 트로이의 목마는 <홈랜드> 전반부의 미스터리를 담당한다. 진짜 선물인가 아니면 선물을 가장한 적인가, 이 매력적인 서사는 탄력적으로 재생산되어 긴장감을 선사한다. 바른 말을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 중동전문 CIA 요원은 신뢰받지 못하는 예언 능력을 가졌던 카산드라의 현대적 캐릭터이기도 하다. 매우 미국적이면서 현대적인 캐릭터, 에피소드들은 흥미롭게도 무척이나 오래된 신화와 통한다.
무척이나 현재적인 작품들, 드라마, 영화, 뮤지컬의 서사 밑으로 오래된 고전의 힘이 흐르고 있다. 텍스트로서의 외면이 스토리라인이라면 그 아래를 흐르는 서브텍스트엔 이렇듯 오래된 것들의 힘이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오래된 것들을 다시 읽고 보고 꺼냄으로써 새로운 것에서 오래된 맛을 읽어 내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원동력이 바로 오래된 것의 공부에 있음을 알려준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면 오히려 아주 오래된 것들을 다시 읽고, 보는 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화재로 노트르담의 첨탑이 소실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놀라고 눈물을 흘린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노트르담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이야기 그리고 수많은 사건이 지나간 장소이다. 현재 존재하지는 않지만 한때 있었던 사람들의 체온과 지문이 남아 있는 곳이며.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어떤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공간이 이야기가 되었고 다시 이야기가 공간을 풍부하게 한, 공간적 고전의 공간인 셈이다.
발터 베냐민은 이러한 흔적을 가리켜 아우라(Aura)라 불렀다. 아주 멀리 있는 것의 일회적 도래가 바로 아우라의 정의이다. 발터 베냐민이 명명한 아우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원작에 해당된다. 하지만 인간의 손을 거쳐 만들어 낸 작품이라면 모든 것에는 나름의 아우라가 있기 마련이다. 1954년의 <사랑은 비를 타고>의 아우라가 <라라 랜드>와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새로운 아우라에 영향을 주고, <푸른 수염>,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이야기들이 다른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자극을 통해 새로운 작품들이 또다시 태어난다. 음악이 될 수도 있고, 미술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인문학이란 그러므로 삶의 흔적에 대한 공부일 테다. 두고두고 다시 읽고, 보고, 써도 닳지 않는 삶의 어떤 정수가 들어 있는 것, 그게 인문학이다. 거기엔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삶은 일회적이며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그 흔적이 곧 공부가 되니, 참 다행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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