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내가 누구인가를 물을 때는 언제일까?

“여기 누구 나를 아는 이 없는가?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 리어왕은 비바람 속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을 원망한다. “정신이 약해졌거나 분별력이 무뎌졌구나. 내가 꿈을 꾸고 있나?”라면서 말이다. 어리석고 늙은 왕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른 이에게 묻고 있다. 그의 질문에 바보 광대만이 대답을 준다. “그것은 리어의 그림자”라고. 자기 자신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결국 그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쩐지 사춘기적 고민 같다. <데미안>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나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처럼 말이다. 세상이 존재하고 그 안에 내가 있는 게 확실한데, 내가 누구인지 묻는 게 뭐가 그리 대수냐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고민은 10대에 끝내는 게 맞다는 말은 한편 자기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는 게 사치스럽고 미성숙해 보인다는 멸시를 품고 있다.


영화 <캡틴 마블> 스틸 이미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자기 정체성은 아이덴티티(Identity)의 역어인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덴티티를 주로 자기 정체성으로 번역하지만 옆 나라 이웃에서는 자기 동일성으로 번역한다는 사실이다. 정체성이라는 역어가 고유한 이상적 자아상을 연상시킨다면 동일성은 변함없는 중심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 어감을 좀 더 분석해보자면 자기 정체성이란 나의 자아 이상을 찾아가는 과정을 전제하고 자기 동일성은 개인의 삶이 분열적이며 모순적인 다양한 표상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엄마, 아내, 딸, 며느리, 교사와 같은 다양한 호명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줄 무엇, 그것을 아이덴티티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2019년 상반기에 개봉했던 영화들 중 몇 편이 이 자기 정체성과 자기 동일성 문제를 꽤나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들의 주인공은 모두 여자이다. 바로 <알리타: 배틀 엔젤>(이하 알리타)과 <캡틴 마블>이다.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이 연출한 <알리타>는 일본의 만화 <총몽>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알리타는 폐기물처리장에서 발견된 인공지능(AI) 로봇이다. 인간의 외모와 닮게 제작된 로봇을 가리켜 휴머노이드라고 부르니 알리타는 휴머노이드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알리타는 주요 메모리가 모두 지워져 있어,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몸에 남아 있는 감각의 기억이 알리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 줄 뿐. <알리타>는 그런 점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알리타가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블사의 새로운 역작 <캡틴 마블> 역시 과거의 기억이 지워진 채로 등장한다. 크리족 전사로서 그녀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통제 불능이라는 이유로 열외되기 일쑤다. 캡틴 마블은 비어스로 불리며 스승인 욘-로그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통제당한다. 욘-로그는 가상 이미지를 통해 비어스의 정신을 검열하고, 불완전함을 이유로 비어스가 자신의 능력을 탐구할 수 없도록 한다. 


하지만 욘-로그가 불러준 이름이 가짜였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비어스가 아니라 캐럴 댄버스였으며 불완전한 게 아니라 너무나 대단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댄버스는 그녀 자신의 본명을 찾아가며 기억을 회복하고 자기 스스로의 힘을 신뢰하고 사용할 줄 알게 된다. 통제 불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 대단했기 때문임도 드러난다. 


알리타와 캡틴 마블, 댄버스의 이야기를 보자면 여전히 여성에게는 자기 동일성의 문제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더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대단한 힘을 가진 이들, 특히 여성이 자신이 가진 능력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알리타나 댄버스는 간혹 자신도 모르게 발휘되는 대단한 능력에 스스로 놀란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들의 주변엔 이미 그 힘의 정체와 파급력을 아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주로 남자로 극화되어 있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그들은 맨스플레인으로 여성 인물들의 능력을 억누른다. 그건 옳고 그르고, 넌 부족하다는 식의 ‘말’로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고 누르고 덮는다. 어쩌면 이는 여성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정체성 누락의 역사와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많이 드물어졌지만 여자니까 그 정도만 알면 돼, 그 정도만 진학하면 돼, 그 정도만 직장인으로 살면 돼라고 끊임없이, 그만해도 돼, 더 나가려거나 알려고 하지마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찾아야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와 같은 영화적 전언들은 꽤나 교과서적이고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아직 그만 한 정체성의 발견도 채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질문의 여부보다는 바로 질문의 시점이 아닐까 싶다. 너무 늦은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자기 탄식에 불과하니 말이다. 너무 늦지 않게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질문에도 적기가 있기 마련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