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광대 없는 희극, 악인 없는 비극

20년 전쯤의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총수 아들에게 과외 공부를 가르쳤다. 대개의 사교육처럼 대입용 중·고등학교 공부가 아니었다. 외국에 있는 유명 대학에서 경영학인가를 전공하고 있던 아들이 교양 시간에 읽는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 작품들에 대한 토론을 하고, 리뷰도 하며 미국식 대학 공부를 도와주었다. 박사과정생이었던 내가 과외선생으로 선택된 이유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정원수로 우거진 긴 진입로를 지나 미술관 같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낯선 위압감 말이다. 그 공간은 지금껏 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대기업 총수’의 집이 조악한 세트에 불과했음을 알게 해줬다. 위압적이었지만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자마자, 그 집의 거실이 떠올랐다. 널찍한 창을 통과한 빛이 가득 차 있던, 언덕 위 저택의 거실 말이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달랐다. 그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주거 형태였다. 아니 삶의 형태였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구나, 느껴졌다. 아주 오래된 과실수가 보이던, 넓은 창이 있던 방의 주인,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설명을 듣던 대학생은 어느새 그 기업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매우 공격적인 영화이다. <기생충>에는 지금껏 봉준호가 그려왔던 모든 세계가 메타포로 조금씩 녹아 있다.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보고, <기생충>을 본다면 영화를 훨씬 더 그럴듯하게 즐길 수 있을 듯하다. 봉 감독이 이 세상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과 불만, 모순과 폭력이 바로 이 영화 <기생충>에서 폭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에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한쪽은 기택(송강호)이 가장인 반지하방 가족. 아내와 아들과 딸로 이뤄진 대한민국 표본 4인 가정인데 문제는 누구도 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치킨집 사장, 대만 카스텔라 가게 사장, 발레파킹, 대리운전. 그런데 이 직업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기택의 여정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선택했지만 가장 많이 실패한 자영업자 사업 항목과 일치하고 있다. 실패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생계형 비정규직의 대표직군을 전전하지만 그걸로 도무지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는 정보기술(IT) 업계의 젊은 CEO 박사장(이선균) 가족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내와 아들과 딸로 이뤄져 있는데, 구성원은 같지만 사는 모습이 너무 다르다. 누구누구 건축가가 지어 낸 이 저택에 비하자면 기택이 살아가는 반지하방은 박사장네 주차장 크기와 다르지 않다. 집이 이런데 한 달 수입은 어떨까? 아마도 기택의 가정 한 달 수입이 박사장네 하루 지출과 맞먹지는 않을까?


줄거리 보안에 대한 봉 감독의 요구에 따라 알려진 내용만 들춰보자면, 기택의 가족들은 권모술수의 달인처럼 보인다. 기우(최우석)는 연세대생도 아닌데 연대생인 척 연기하고, 여동생 기정(박소담)은 어마어마한 실력의 미술치료사 노릇을 척척 해낸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지내다 보니 세상을 쉽게 믿는 박사장네 부부를 요리조리 골려 먹고 놀려 먹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뭔가 그들의 술책이라는 게 너무 나약해 보인다. 박사장네 부부가 모기업 총수 아내나 자녀들처럼 막돼먹거나 천박한 것도 아니다. 아이들도 버릇없고 교만하지 않고 오히려 순진하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갈수록 기우네 기정이 딱해 보인다. 어쩐지, 그들이 ‘나’처럼 보인단 말이다.


사실, <기생충>의 공격성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이 묻어둔 계급적 정체성과 죄책감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나를 비롯한 대개의 관객들은 반지하방과 언덕 위 저택 그 두 공간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점에선 기택의 입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때로 어떤 장면에선 우리가 ‘갑’이라 부르며 백안시했던 박사장 부부와 닮아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대개 스스로를 사회적 ‘을’이라 여기며 분통 터져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갑’이 되어 ‘을’이었던 시절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봉준호 감독은 촌철살인의 대사들로 우리 사회 양극화의 본질을 관통한다. ‘냄새’에 대한 표현이 특히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 예의 바르고 친절한 박사장이지만 누구든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며 불쾌해한다. 손을 뻗거나, 발을 들이밀거나 할 땐 선이 유효하다. 하지만 ‘냄새’ 앞에서 선은 무방비다. 부유하고 안정된 그들의 삶의 경계 너머로 스며드는 ‘을’들의 냄새. 박사장은 이를 가리켜, “지하철 탈 때 거기서 나는 냄새”라고 표현한다. 대중교통, 대중의 삶,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나는 냄새, 그것에 대한 경멸. 지금껏 어떤 영화에서 보아왔던 갑질보다 더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표현.


모든 행복한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갖가지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부유한 사람은 비슷한 집에서 살고 가난한 사람은 갖가지 형태의 집에서 살아가는 듯싶다. 부유한 사람들은 넓고 높은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판자촌에서, 꼬방동네에서, 달동네에서, 철로 변에서, 보트 위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간다. 언젠가 저 높고 넓은 집을 갖고 내가 한 번 살아보리라, 꿈을 꾸는 것도 불가능한 ‘꿈’이 된 현실. 봉 감독 말마따나 ‘광대가 없는 희극, 악인이 없는 비극’인 <기생충>에는 그 지독한 현실의 냄새가 담겨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