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믿음의 벨트

영화 <조>에 등장하는 여성형 로봇 ‘조’.


로봇권이 가능할까? 우리가 인공지능이라 부르는, 나름 사고의 능력을 가진 기계가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이 질문은 허황되어 보이지만 사실 300년 전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시민이 되어 시민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불가능했다. 그 이후론 여성권이 그랬고, 아동권도 그랬으며, 동성애자들의 권리나 동물들의 권리가 뒤를 이었다. 여성에게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시절도 있었다. 


물론, 명실상부한 동등과 완전한 권리는 여전히 획득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여전히 많은 동물들이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받기보다 사유재산이나 기호품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개의 주인이 자신의 개를 학대하는 것을 뭐라 말할 수조차 없었다. 개의 동물권이 개인의 사적 소유권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쓴 스티븐 핑커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엘리트 대학의 공학부에 임용된 남녀 교수 비율도 따질 수 있다. 가부장제가 공공의 이데올로기이던 시절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며 나아진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은 황당한 질문으로 보이는 로봇의 권리가 시간이 흐른 후 우리 사회의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앞선 권리의 발전사를 보면 권리를 뜻하는 ‘권’ 앞에 놓인 것은 적어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는 사실이다. 인간에게만 한정되던 권리가 동물에게까지 확장이 되었지만 여하튼 생명체이다. 하지만 로봇은 적어도 생명체는 아니다. 까다로운 것은 사람이 아닌데 만약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고, 고통과 기쁨을 느낀다면, 과연 로봇과 인간의 차별점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생각할 수 있는 로봇과 인간의 구분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영화 <조>는 생각하는 로봇과 그 로봇을 개발한 과학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다. 


여성형 로봇 ‘조’는 자신이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고 심지어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자각하고 있던 남성형 로봇은 사랑에 빠진 여성형 로봇에게 인간과 로봇 사이에 ‘선’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이 사랑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 너무나 쉽게 두 개체는 사랑에 빠지고 또 나눈다. 위기는 그다음에 오는데, 인공지능 로봇 ‘조’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그만 자신의 개체 내부를 개봉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교감했다고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내부는 그녀가 기계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작가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남자는 순간 멀미를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과 관념의 차이가 심각한 통증과 괴로움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고통은 여성형 로봇 ‘조’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다른 기계, 로봇들을 볼 때 배가된다. 개인을 뜻하는 영어 인디비주얼(Individual)은 어원상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즉 너와 나 사이에 전혀 공유할 수 없는 차별성, 이게 바로 개인이라 부르는 인간 고유성의 핵심을 이룬다. 고유성을 갖지 못하는 것, 마치 전자제품을 전시한 매장에 서 있는, 새롭게 출시된 매끈하고도 세련된 새 상품과 같은 것. 그렇다면 같은 외모를 가진 로봇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런데 돌이켜보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바로 ‘믿음’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생각하는 로봇이 인과의 사슬로 창조되었다면 사람은 믿음의 벨트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가 있다. 심지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의 유지를 포기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순교처럼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는 육체를 가진 동물로서의 본성에 완전히 위배된다. 그 어떤 영장류도 보이지 않는 관념적 믿음의 대상을 위해 생명까지 걸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감촉되지도 않는 어떤 대상을 믿는다. 


관심을 끄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발달하면서 믿음이 더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논리로 해결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믿음에 더 의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지구는 평평하다> 등장인물들만 해도 그렇다. 플랫 어스를 믿는 사람들은 학회를 꾸리고 콘퍼런스도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은 학술적 모임이라기보다 일종의 간증회와 더 닮아 보인다. 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평화로워졌는지를 끊임없이 고백한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이 ‘믿음의 벨트’를 가졌을 때에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이 인간의 종적 차별성이기도 하지만, 한편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허약한 존재가 인간일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 믿음은 인간만이 빠질 수 있는 오류의 근간이기도 하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가짜뉴스를 믿다 못해 따라다니고 수집하는 사람들, 태극기를 들고 어김없이 광화문광장을 찾아 그들만의 믿음을 나누는 사람들. 믿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지만 때로는 믿음이야말로 도피처일 수도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