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작은 승리의 가치

영화의 끝은 대개 승리다. 올여름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대작 4편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나랏말싸미>는 육신의 병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하는 세종의 이야기고, <사자>는 악의 화신을 물리치는 신의 사자의 이야기다. <엑시트>는 정체불명의 연기로부터 도망쳐 마침내 살아남는 이야기고, <봉오동 전투>는 숫자로 보면 불가능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어떤 것은 실화를 소재로 하고, 어떤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상상을 다루고 있다. 악마나 구마의식이 실제 있다고도 하지만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기는 어렵고, <엑시트>의 살상 가스는 영화의 허구적 창작품이다. 여러 형태를 가진, 가상의 적에 맞서 주인공들은 원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자>의 주인공은 악의 사제가 집어 삼키고자 하는 영혼과 이 도시 서울을 구하고자 하고, <엑시트>의 주인공들은 도의와 정의를 지키면서 재난 속에서 살아남고자 한다. 악과의 싸움에서 악의 소멸이 승리라면 생존의 싸움에서는 살아남는 게 곧 승리다. 우리가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이야기의 종말은 그런 점에서 모두 승리의 결말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수적 열세의 싸움에서 승리한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일제 치하의 역사 속 작은 성취를 드러내 재구성했다.


영화를 두고 현실의 반대를 의미하는 판타지라고 부르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현실의 이야기는 꼭 승리로 끝나라는 법이 없다. 악과 싸운다고 해서 선이 이기고, 재난 상황에서 도망치면 꼭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다. 심지어 악과 선의 경계도 모호해서 때로는 살아남는 사람 자체가 선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언제나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부르는 주인공, 선한 이들이 살아남는 데 성공하고 악을 처단한다. 이게 바로 영화적 판타지다. 현실에서는 확률적으로 매우 어렵지만 영화에서는 그 어려운 일이 가능해지고 또 실현되기도 하니 말이다. 


영화이론가 수전 헤이워드는 판타지를 가리켜 우리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판타지란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꿈과 무의식 속에 그럴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판타지는 욕망의 영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로운 자가 살아남고, 선이 악을 물리치고, 신의 사제가 악마를 물리치는 그런 사필귀정, 현실에서는 원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영화에서는 실현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작은 성취들을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보는 냉정한 시선은 여기서 비롯된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승리도 많기 때문이다. 


원신연 감독의 <봉오동 전투>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판타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판타지라는 표현이 어색할 텐데, <봉오동 전투>는 실제 사실, 역사를 근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7일 중국 지린성 왕창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를 가리킨다. 같은 해 10월에 있었던 청산리대첩에 비해 봉오동 전투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근대사를 보면 1920년은 분명 일제강점기의 시작 부분이다. 아프지만 엄밀히 말해 패배적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봉오동 전투>는 그 패배의 역사 속 작은 성취를 드러내어 그 성취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거시적 기록에서야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의 시절이지만 적어도 1920년 우리에겐 성취와 승리의 기록이 남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사실, 어떤 점에서 이 작은 성취야말로 일제강점기라는 얼룩진 역사보다 더 질기고 강인한 승리의 서사일 수 있다. 연대기별 역사 서술에서 비록 식민지 강점기였다고 해서, 그 압제 가운데 있었던 작은 성취를 괄호에 넣을 수는 없다. 큰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면 다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 사실 그것이야말로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그 제국주의적 발상의 가장 반대편에 놓인 예술행위다. 영화는 어쩌면 역사에 남지도 않을 작은 성취들, 그 성공이 가져오는 연쇄작용이 불러올 작은 성취의 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그 작은 성취가 모여 변화가 이루어지고,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 세상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작은 성취를 통해 진정한 승리와 인간의 힘, 의지의 가치를 돌아보는 행위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홀로코스트 속에서 유대인 전부를 구해서가 아니다. 그는 일부의 사람들을 구했지만 그 자체가 인류의 존엄함과 인간으로서의 종적 차이를 드러내 주었다. 나치의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역사적 기록과 폭력 앞에서 쉰들러가 한 일은 아주 작은 성공이자 성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가 작아질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 작은 성취에 대해 지나치게 박한 평가를 내려왔다. 일본의 경제도발에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불매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작은 성취의 불가능성에 대한 역사주의적 패배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비록 이 불매운동이 영구히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가치할 수는 없다. 일본산인 줄 몰랐던 제품의 원산지를 기억하고, 연필이나 볼펜 같은 사소한 문구를 살 때 한 번쯤 고민해보고 국산을 사는 것, 이 작은 시도와 그것의 성공이야말로 성취다. 작은 성공이라고 해서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작은 성취와 성공,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거친 역사의 틈바구니 속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