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기술자가 사라진 빵집

대학을 다닐 때 이른바 건설일용노동자를 잠시 했다. 새참으로 빵이 나오면 선배들-김씨니 박씨니 하는 오직 ‘씨’로만 불리던 늙수그레한 막노동자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어렸고, 빵이 좋았다. 왜 빵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빵은 지긋지긋한 집 음식과 다른 세계였다. 우선 달았다. 단팥이나 크림이 들어 있어서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나중에 빵 공장에 다니고 싶었다.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학교 앞에서는 빵을 팔았다. 제일 좋아하는 건 찐빵집 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를 통해서 전파되었을, 팥이 들어간 그 찐빵은 구수하고 비릿한 효모 냄새로 이미 반쯤 넋을 빼앗는 존재였다. 구멍가게에서는 보름달이니 삼립크림빵이니 하는 공장 빵을 팔았다. 노을이라는 이름의 기다란 빵은 양이 많아서 인기였다. 제과점에서 탁자를 차지하고 식빵을 시켜도 되던 때였다. 설탕을 달라고 해서 찍어 먹었다. 음료수 한 잔 없이도 그 빵이 꿀떡 넘어갔다.

 

 

빵은 호화로운 간식이었다. 그 빵값을 아끼려고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제빵기’를 월부로 사들였다. 반죽 레시피대로 만들면, 질척하고 달콤한 이상한 ‘케이크’가 탄생했다. 그걸 얻어먹으러 친구네 가기도 했다. 우리 엄마에게 그런 기계를 사달라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가정용 제빵기계도 알고 보니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이었다. 정식 라이선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은 기계가 지금도 일본에서 팔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일본 빵의 세례 속에서 살았다. 유명한 빵집의 대다수는 일본인들이 패전과 함께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일종의 적산자원이었다. 기술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그곳에서 다시 빵을 구웠다. 아직도 일본풍의 빵이 우리 제과점에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일본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빵을 배웠다. 군국주의 국가가 되면서 해군 중심의 군사문화가 널리 퍼졌다.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는 서양식 식생활을 퍼뜨리는 매개체였다. 빵과 고기를 일본인의 식탁에 올리는 숙주였다. 화혼양재(和魂洋才)랄까, 유럽의 빵이 일본화되기 시작했다. 딱딱한 하드롤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도록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스트 냄새 대신 누룩으로 발효시켰다. 술빵이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으로 단맛이 없는 ‘식사용 빵’ 대신 단팥을 넣어 맛을 바꿨다. 달지 않다는 뜻의 ‘식빵’이라는 말도 바로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그 빵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부족한 장비와 시설로 기술자들이 빵을 구워냈다. 그렇게 우리 빵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어려운 환경에서 과자를 굽고 제빵하던 기술자들의 맥이 아슬아슬하다. 프랜차이즈 빵이 대세가 되면서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빵의 다수는 공장에서 납품받아 진열된다. 어린 제빵 기술자 지망생이 그 프랜차이즈빵집의 좁은 부엌에서 몇 가지 빵을 굽기는 하지만, 마이스터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주요 도시의 터줏대감 빵집들도 거개 사라지면서 우리 빵 역사도 묻혀간다. 아쉽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동체 음식’ 국밥  (0) 2017.03.24
국밥과 토렴  (0) 2017.03.10
그릇도 맛을 낸다  (0) 2017.02.10
소주 5000원 시대  (0) 2017.01.13
겨울요리  (0) 2016.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