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그릇도 맛을 낸다

옛 그릇을 보고 사서 쓰는 게 취미다. 福(복)자가 새겨진 밥주발이나 국그릇, 막걸리 잔이다. 내 손에 들어온 낡은 그릇에는 이력서가 없다. 누가 이걸로 밥을 먹었을까, 쌀은 제대로 넣어서 지은 밥일까, 이 작은 종지에 넣은 건 무슨 반찬이었을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동시에 처연해지기도 한다. 주인 잃은 그릇, 대개는 버림받아서 결국 내 수중에 온 셈일 테니까. 거기에 옛사람들의 궁핍했을 삶까지 겹쳐서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그릇 구하기는 몇 해 전까지는 상당히 쉬웠다. 한번은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골동가게에서 그릇을 골랐더니, “그냥 한 박스 가져가. 막걸리값이나 주고” 이러신 적도 있다. 요즘은 제법 멋을 낸 그릇들(더러 금박을 두른 대접도 있다)은 몇 만원도 나간다. 울퉁불퉁하고 색깔도 고르지 않은, 그저 실용적인 용도에 최소한의 치장을 한 그런 그릇에 국을 담고 밥을 푸면 마음도 편해진다. 일본의 도자기를 이르는 야키(燒)들은 아름답고 예술적인 경우가 많은데, 놓고 감상하기는 몰라도 시금치와 김치를 담자면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옛 그릇이라고 해서 사기나 도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스테인리스강, 그냥 일제강점기식 언어로 치면 ‘스뎅’인 금속 그릇도 옛 물건에 든다. 우리 옛 그릇 문화를 몰아낸 주범(?)이며 멋대가리 없는 소재라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조차도 옛 멋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쉽고 따뜻한 영혼이 깃드는 것 같다. 스테인리스 그릇도 잘 보면 오래된 흔적을 가질수록 멋이 깊다. 소재 특성상 고급할 수 없어 더 애착이 간다. 정릉동의 숭덕분식은 40년이 넘은 초등학교 앞 떡볶이집이다. 이 집의 명물은 즉석떡볶이를 담아주는 스테인리스 그릇이다. 오래되어 반질반질하고 편안한 그릇에 어린 학생들이 떡볶이를 담아 먹는다.

 

스테인리스는 원래 크롬과 철의 결합이다. 단단하고 녹이 안 스는 데다가 가벼워서 총신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전쟁물자가 사람의 생활을 이롭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금속은 전방위로 우리 생활에 들어왔다. 제기(祭器)가 바뀌었고 앉은뱅이 식탁이 되었으며, 수저도 모두 바뀌었다. 요즘 스테인리스는 가벼워서 경박하다. 예전 것은 상당히 무거운데, 이는 얇게 철판을 제조하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스테인리스 그릇을 제조했던 장인들을 만났더니 이것도 현장의 역사가 있었다. 양은과 놋쇠를 밀어냈는데, 멜라민에 치여서 찬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용으로 쓰이는 속칭 ‘뱅뱅들이’(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제조방법) 주발과 국그릇, 냉면 그릇 등을 만들면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중국산 수입품이 들어오면서 이 산업도 큰 타격을 받은 상태다.

 

봄이 되면 마산 진동면의 삼거리식당을 가야지, 하고 벼른다. 이 집에서 제철에 맞춰 해주는 미더덕요리도 좋은데, 특히나 낡은 스테인리스 그릇이 좋기 때문이다. 던져도 깨지지 않고, 위생적으로 잘 닦이고, 그래서 고단한 시장거리 아주머니들의 선택을 받았던 스테인리스 그릇들이야말로 얼마나 장한 존재인가 싶어진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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