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7) 승효상 - 폭음과 바꾼 신혼 첫날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1980년 여름 나는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도피였다. 그해 5월의 광주를 보는 일이 너무 힘든 나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미국 땅은 가기도 싫었지만,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떠나야 했으므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신의 요셉프라처 신부의 도움을 받아 빈 공과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아 쥐고 8월 말 비행기를 타게 된다.

 

나는 71학번이니 유신체제가 본격 가동될 때 대학을 다녔다. 휴교령으로 으레 학교수업은 비정상이었지만 간혹 듣는 강의도 신통치 못해 나는 대학을 겉돌았다. 시위대에 가담하는 것도 잘 허락되지 않았다. 그 당시 데모의 주동이던 고등학교 선배가 내게는 건축 공부에 전념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마 미친 듯이 팔팔거리던 내 꼴을 보다 못해 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명령이었다. 그 이후로 건축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1974년 말 이미 한국 건축계의 거목이었던 김수근 선생이 이끄는 ‘공간’에 들어갔다. 선생은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졌는데 그 권위가 나는 싫었다. 어쩌면 그의 카리스마를 깨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죽기 살기로 건축을 붙들고 싸웠다. 집에 가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입사 첫해에 가장 밤을 많이 새운 직원으로 뽑혔을 정도였다. 세상과 절연했다. 그렇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가 돌을 던지고 있어야 했으니, 건축은 내게 사투였다.

 

승효상 이로재 대표 ㅣ 출처:경향 DB

일이 끝나 시간이 비면 술에 탐닉했다. 소주 일곱 병, 여덟 병… 술의 양은 늘 늘었고 미친 듯이 마셨다. 그 비어 있는 시간을 맨 정신으로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꼴을 좋아할 이가 있었을까?

 

빈행이 확정된 것은 6월 말이었다. 9월 개학을 두 달 남긴 시점이었다. 돌아올 기약이 없는 이별이라 사무실과 가족 모두를 내 일상에서 떼내어야 했다. 김수근 선생의 비서가 있었다. 사무실 동료들 모두 노리는 재원이었지만 나는 언감생심이었다. 늘 꾀죄죄한 몰골과 핏빛 어린 눈으로 사무실을 휘젓는 나는 기피대상이었고, 월급날만 되면 외상 술값을 받으려고 나를 찾는 술집 웨이터와 마담들이 사무실 입구에 줄줄이 섰으니 망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 여인을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콧대 높은 그녀도 내가 곧 떠나는 것을 알아서인지 차 한잔 하자는 내 말에 순순히 따라와서 맥줏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런데 정말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내가 청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웃음 받을 일이 순간 두려웠는데,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내 돌발적 발언에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고 불과 닷새 후에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허락을 받았다. 모두가 놀랐지만, 우리는 내가 떠나기 일주일 전에 약혼식을 치렀다. 전광석화였다. 6개월 후 돌아와서 결혼식을 거행한 후 같이 떠나기로 했다.

 

나는 프라처 신부의 도움으로 빈 시내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살게 되어 있었다. 그 수도원은 은퇴한 신부들이 죽을 때까지 기거하는 곳인데, 문제는 식사였다. 맨날 매끼마다 검은 소시지 두 개와 마른 빵이 식사의 전부였다. 숙식이 무료여서 돈 없는 내겐 감지덕지의 장소였지만 이 시커먼 소시지를 평생 먹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약혼녀를 설득해 빈에서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고, 나는 4개월 만에 수도원을 떠났다.

 

결혼식은 빈 남쪽 시골마을의 오래된 성채 교회에서 모두 열세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첫눈이 왔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의 결혼식은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온갖 회한이 몰려왔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4개월을 금주하며 지냈던 내가 분에 넘치는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피로연에서 폭음한 것이다. 비틀거리며 집에 오던 중 정신을 잃고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나가던 행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에 와서 누웠겠지만 이역만리를 건너온 신부에게 그 밤은 악몽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사태의 심각성에 후회막급이었으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 후 우리 부부의 관계가 어떠했을 것인가는 상상에 맡긴다. 힘의 균형에서 이미 밀린 나는 부부싸움을 할 수 있는 남자들의 대등한 위상을 여태 부러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