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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25) 박상우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박상우 | 소설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는 자부심으로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내가 나와 한 몸일 거라는 확신과 자만심, 심지어 오만함까지 부둥켜안고 살았다. 하지만 인생의 파노라마 속에서 나는 나와 매순간 불화하고 갈등하며 별달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안아주고 싶은 순간에도 외면하고, 위로가 필요한 시간에도 질타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세월을 함께 살아온 것이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걸 깨친 것은 세상을 40년이나 살고 난 뒤였다. 소설 쓰는 일에 지쳐 심신을 충전하기 위해 산천을 떠돌던 시기에 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를 만나 깊은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를 망상자아와 근본자아라고 불렀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구축한 것이 오직 망상자아뿐이었는데 그 무렵에 존재감을 드러낸 근본자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지닌 것이라 그동안 내가 유지해온 삶의 무지망작을 단박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근본자아와의 조우를 통해 나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근본자아는 우주 만물의 바탕이라 ‘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나라고 내세우고 나라고 이름 붙인 모든 것들이 개체의 욕망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망상자아의 산물이니 근본자아 앞에서는 맑은 유리창에 비친 풍경처럼 모든 것이 덧없고 허망하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이런 의구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소설가 박상우 ㅣ 출처:경향DB

 

어떤 순간의 내가 진짜 나인지, 어떤 조건의 내가 진짜 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름 석 자, 주민등록번호 열세 자리 같은 건 더더욱 나의 본질일 수 없을 터. 나라는 존재의 허구성을 깨치자 의식으로 넘나들던 망상의 봇물이 흐름을 멈추고 비로소 마음에 고요가 깃들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망상의 물줄기가 끊어지자 맑은 영감이 샘솟아 창조적인 발상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상한 우주의 대설(大說) 앞에 내가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고작 소설(小說)!’이라는 것도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대설도 아니고 고작 소설을 쓰는 주제에 이렇게 자의식 과잉에 시달리며 망상증 환자로 살아왔다는 자각이 아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나에게 가장 모질고 혹독하고 가혹한 존재로 군림했다. 재능을 질타하고 소극성을 원망하고 인생의 조건을 한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의 근원이 망상이라는 걸 깨친 뒤부터 나는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망상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던 새벽, 근본자아의 품에 안겨 나는 온몸이 해체되는 듯한 오열을 터뜨리며 마음에 맺힌 모든 응어리를 풀어놓았다. 그 순간 무변광대한 우주적 언설이 근본자아의 포옹에 압축되어 고압전류처럼 영혼으로 흘러들었다. 우주적 존재감, 정신적 대자유… 말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근본자아와의 일체감을 나는 그렇게 경험했다.

 

이제 나는 나와 불화하지 않는다. 불화할 현실적 근거를 모두 상실하고 근본자아의 영역에 의식을 두고 살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우러난 맑은 영감을 글감으로 삼고 그것을 세상 사람과 나누고자 하니 매사가 보람이고 또한 기쁨이다. 나라는 망상을 내세우고자 하지 않으니 욕망에 시달릴 일이 없고 마음이 편안하니 초조하고 불안할 근거도 없다. 하루하루, 매 순간을 사는 일이 창조이고 창작이라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가 모두 금쪽같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하나의식으로부터 긍정의 에너지가 우러나 나는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너의 풍경이고 너는 나의 풍경이야. 하지만 풍경은 매 순간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야. 눈에 보이는 풍경 너머에 진짜 존재가 있어. 그러니 풍경이 스러질 때까지 다만 그것을 바라봐. 마음에 뜻이 없어지면 풍경도 절로 소멸돼.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져 우주만물과 완전한 하나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