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52) 탁현민 - 재수 좋은 날… 신영복 선생님께 탁현민 | 공연연출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날이 떠오릅니다. 공인 문제아였던 제가, 담배를 피우다 하루에 세 번 걸린 날이었었죠. 저는 교무실 한쪽에서 모눈종이에 반성문을 쓰며 머리를 쥐어박히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 세상엔 이렇게 재수 없는 날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그날, 오가는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렇게 있다가 문득 국어선생님 책상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책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 바로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을 보며 감옥이나 학교나 비슷하겠거니 하는 생각과 그 안에서의 사색이라면 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날은 제 생에 가장 재수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51) 전상국 - 천국에 계신 유재용 형께 전상국 | 소설가 2522. 형이 없는 형네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돌아가신 뒤 처음 듣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형이 그토록 애틋이 사랑하던 정현과 국현의 소식을 듣습니다. 결혼 전부터 선교활동을 함께한 국현이 부부가 미국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치는 가운데 며느님이 둘째 애기를 가졌다는군요. 정현이 역시 어렵게 얻은 딸을 키우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정현이 국현이 두 남매를 두신 것처럼 형은 등 일곱 권의 중·단편집과 등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이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형은 이 시대의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 큰 작가였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 능청과 시치미가 작품의 깊이, 그 철학의 형상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짐으로써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어떤 높은 경지를 독자에게 안겨주는, 형 특유의..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50) 전경린 - 내 상상 속의 K씨께 전경린 | 소설가 K씨, 당신이 나에게 첫 편지를 쓴 것은 30여년 전이었어요. 그보다 먼저, 내게 음악을 보냈고요. 그것은 당신이 직접 만든 일곱 개의 시디였어요. 그 울림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풀려나오는 일곱 타래의 음악, 흘러내리는 일곱 강물의 음악, 눈과 비와 안개와 꽃잎이 쏟아지는 일곱 계절의 음악, 반짝이는 광휘 속에서 운행하는 일곱 행성의 음악…. 그때 나는 음악 없는 기간을 지나고 있었어요. 가구를 모두 치운 것 같은 빈방에서 오직 문장들을 생각하고 문장을 쓰고 문장을 읽었지요. 바스라질듯 메마르고 팍팍하고 지독히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잔인하게 나를 정화하듯이요. 별 기대도 없이 첫 시디를 오디오에 걸고 소파에 앉았을 때, 오랫동안 폐쇄시킨 방문 앞으로 음악이 범람하듯 밀어닥쳤어요. 은..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9) 문정희 - 나의 잠옷 친구에게 문정희 | 시인 햇살 속에 벌써 가을이 들어있네요. 비애가 문득 스쳐갑니다. 아니, 비애가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원숙씨네 인디애나 집 넓은 마당에는 지금 어떤 꽃들이 피어있는지요. 햇빛 알레르기가 심한 내가 빨간 우산을 쓰고 토마스씨가 모는 지붕 없는 달구지 차에 실려 포도농장으로 와인을 사러 갔던 저녁이 떠오릅니다. 그 차 이름이 ‘모든 지형에서 가는 차(all terrane vehicle)’라고 했지요. 정원 한쪽에 서있던 작고 투박한 차가 골짜기이든 바위 절벽이든 막힘없이 다니는 차라니요. 마치 원숙씨가 세계 구석구석을 막힘없이 다니듯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 만든 재미있는 사건과 경험들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8) 윤효 - 지구의 주인, 나무에게 윤효 | 시인 이른 아침부터 붉은 울음을 가쁘게 토해내고 있는 저 매미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헤아리며 네게 이 편지를 쓴다. 여러 해 동안의 땅밑 세월을 견디고 얻은 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겨우 한 달뿐이라는데, 그래서 저리 울어대는 것일까? 아니면, 땅밑이 훨씬 아늑하고 평화로웠다고 사무치게 그리며 울어대는 것일까? 나무야, 며칠 전에 이 편지의 청탁을 받았어.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에 떠오르는 가장 그리운 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달라는 거야. 좋다 했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 붙은 단서였어. 수신인에서 가족은 제외해 달라는 거야.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을 떠올리되 살붙이는 빼라니, 피붙이는 배제하라니. 세상에 이리 가혹한 청탁이 또 있을까? 나무야, 그렇다면 누구일까, 누구여야 할까? 내게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7) 이병률 - 나의 시에게, 허수경 시인에게 이병률 | 시인 나는 지금 막 시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습니다. 시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마음 한쪽 편이 가득 채워지는 건 먼 곳에 있는 한 시인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 편지는 그리하여 독일에 있는 당신에게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시에게 당부할 것이 있었고, 야단칠 것이 있어서 같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다음 같이, 다시, 태어나자는 편지를 쓸 참이었습니다. 선배 생각이 달려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시를 생각하면 그리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당신을 시로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시 이야기를 물어봐준 사람이 당신이고, 내 시를 고백한 사람이 당신뿐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여 나의 모든 안부는 당신의 안부이기도 하겠습니다. 선배는 긴 집 공사를 다 마쳤는지요.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6) 김형경 - 상원사 전나무숲님께 김형경 | 소설가 ‘생의 마지막에 쓰는 단 한 장의 편지’라는 주제의 글을 요청받았을 때 저는 즉각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면 반드시 그 숲을 디디고 올라, 숲 속으로 스며들어, 가뭇없이 허공으로 흩어지리라 꿈꾸어둔 그 숲이지요. 처음에 그 숲은 죽음 충동과 관련 있었습니다. 20대 시절, 생에 대한 지식과 지혜도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생을 던져 헌신할 대상도 찾지 못했던 그 시기에 저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잘못 온 것 같았습니다.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좀 빨리 온 게 틀림없다 여겼지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마음 가득했지만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서둘러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들은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5) 김홍신 - 하늘이 그대를 탐낸 것이라오 김홍신 | 소설가·건국대 석좌교수 삶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오. 인생은 신묘하게도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때론 행복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매혹적인 것은 죽음 때문이라오. 좀 더 나와 함께 살았으면 오히려 오욕칠정을 다 삭히지 못해 심사가 곤궁했을 텐데, 멀쩡한 날보다 아픈 세월이 너무 길었던 당신의 힘겨운 모습을 차마 더 볼 수 없어 하늘에서 얼른 데려간 것이라 생각하오. 사람은 하루에 2만2000번쯤 숨을 쉬고 10만번쯤 심장이 뛰는데 그대는 병약한 탓에 숨도 가쁘게 쉬고 심장도 가쁘게 뛰었으니 그 얼마나 많은 순간 힘겹게 살았는지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오. ‘인생은 잘 놀다가지 않으면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내가 그대와 잘 놀지 못한 잘못이 어찌 작으리오만, 그대는 조금 일찍 떠났을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4) 김선재 - 처음이라는 마지막에게 김선재 | 시인 아무도 몰래 떠난 여행이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내 안으로 온전히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빨랫줄에 누군가 널어놓은 홑청 사이로 몸을 숨기듯, 장롱 안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듯, 나는 잠시라도 숨죽일 곳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현듯 어떤 지명을 떠올렸다. 선명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어떤 곳. 내가 태어난 곳이었다. 원고들이 책으로 묶이는 동안 나는 알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는데, 그것은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약력의 첫 줄에 관한 것이었다. 의미 없는 기록이었지만 결코 바뀔 수 없는 기록이기도 했다. 태어난 곳, 그러나 오래 잊고 지내던 곳,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 그 고향이라는 단어는 이 대지에서 인간이 첫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부여받게 되는 굴..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3) 김주영 - 티베트 라마가 돼 있을 나에게 김주영 | 소설가 그를 만난 것은 벌써 12년 전의 일이었다. 하필이면 우기인 6월 하순에 히말라야 산록 아래의 티베트 여행을 떠나다니…, 여행 도중 필경 궂은 날씨 때문에 곤욕을 치르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일자를 6월 하순으로 잡은 것은 일곱명을 헤아리는 동반자 중에 두 사람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날 우리 일행은 세계의 오지로 일컫는 티베트의 오지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티베트의 시가체에서 장체로 가는 길이었다. 18인승의 작고 낡은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허둥지둥 기어가고 있었다. 척박한 농경지를 가로지른 도로에는 진눈깨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가 돌출해 있는 돌부리에 걸려 갸우뚱거릴 때마다 차체의 쇳조각들이 긁히는 소리와 가만두어..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2) 김성중 - 막걸리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 나에게는 단 한 장의 종이가 남아 있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흰 종이가 수많은 수신자를, 벗들과 적들을 넘어 거의 전 인류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적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파는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세 번쯤 당신이 파는 술을 마셔 보았고 서른 번쯤 막걸리통으로 그득한 당신의 리어카를 목격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길가에서, 도처에서 막걸리를 팔았습니다. 당신의 옷차림만큼이나 낡고 닳은 리어카 바퀴가 멈추는 순간이면 어디서나 당신의 상점이 되곤 했습니다. 까맣게 탄 얼굴, 크고 우렁우렁한 목소리, 아무에게나 서슴없이 다가가 막걸리를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41-1) 마광수 - 그리운 H에게 마광수 | 연세대 교수 이렇게 너에게 편지로나마 용서와 재회를 간청해본다. 나이를 먹다보니 시간이 하도 빨리 흘러가서, 너와 만났던 것이 몇 년전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3,4년 전쯤 되는 듯 싶다. 너를 알게 된 것은 네가 독자로서 나에게 이 메일을 보내서였다. 내가 맨날 글에다가 칭얼거리며 보채대는 나의 페티시(Fetish·성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물)인 ‘긴 손톱’을 네가 한번 네일아트 숍에 가서 가장 긴 걸로 붙인 다음 내게 보여주고 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게 웬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그래줬으면 고맙겠다고 대답하고, 모조손톱 붙이는 비용을 내가 치러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너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날, 나는 네가 붙이고 온 모조손톱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나 길어 그만 홀라당 감격해버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