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16) 장석남 - 화가 장승업 선생께 장석남 시인 저편에 계신 장승업 선생님.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그 세계에 가야만 하고 이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왜 문득 선생을 수신인으로 하고 싶었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사와 같은 것입니까? 그와는 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세계이기에. 그 두려움을 이기고자 한 것이 철든 이후의 내 삶 전체였는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가 어쩌다 잘못 들어서게 된 문명이라는 미로가 모두 그런 것만 같습니다. 만약 얼마간의 명예와 얼마간의 알량한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그 두려움을 감추고자, 혹은 외면하고자 한 방편들, 방패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들, 사랑의 기억들, 그것들도 마찬가지! 선생은..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15) 윤영수 - 노력은 해볼게요 소설가 윤영수 당신을 누구라 불러야 할지 저는 모릅니다. 당신을 뵌 적도, 목소리조차 들은 적도 없으니까요. 제 뜻과는 관계없이 세상에 저를 던져놓으셨으니 또 어느 순간 당신 뜻대로 제 삶을 거두시겠지요. 부탁드려요. 너무 아프게도, 너무 흉하게도 말아주세요. 따져보면 중간부분도 온전한 제 의지는 아니었어요. 처음과 끝에서 당기는 끈이 워낙 거센 데다 당신이 신명나게 던지신 수많은 인간들의 각기 다른 의지와 쨍강쨍강 부딪히느라 끊임없이 피를 흘려야 했거든요. 모든 이의 시선을 피해 쫓기듯 혼자 숨은 공간, 이곳이야말로 안전하겠지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저 스스로 저를 가둔 함정이었고, 큰길에서 다른 이와 똑같이 행동했으니 아무 문제없다고 안심하는 순간, 그 사람들 모두 겉으로는 의연하되 속으로는 겁에 질려..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14) 곽금주 - 그때 미안했고 고마웠어요 곽금주 |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지금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싶은 일들이 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해서, 마음이 넉넉지 못해서, 아니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생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라서, 그만큼 성숙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내 나이 만 스물여덟,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이다. 그때 나는 과정을 가능한 한 단축시키기 위해서 대학원 첫 학기에 5과목을 이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만큼 힘든 일이었다. 우선 영어가 들리지 않아서 늘 강의 시간이 끝나면 일일이 교수를 찾아가서 내가 이해한 바가 맞는지를 다시 확인해야 했고, 학사 행정을 알기 위해 늘 지도교수님의 방에 가서 물어보곤 했다. 당시 지도교수님 곁에는 교환교수로 와 있는 친한 브라질 교수가 있었는데..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13) 전유성 - 장섭·제비에게 세 번째 띄운다 전유성 | 개그맨 “너희가 결혼하면 매년 한번씩은 꼭 편지를 써야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게 쉽지가 않구나. 이번에도 계속 미루어 오다가 타의로 편지를 쓰게 됐다만, 이런 계기라도 생기니 더 이상 미루지 않아서 좋구나. 여행 중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면,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는 토박이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요즘엔 토박이가 아닌 사람도 많더라. 거제도의 조그만 섬을 사들여서 몇십년 동안 그 섬을 가꾸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 사람, 제주도의 매력에 빠져서 일찌감치 작정하고 육지를 떠나온 사람, 지리산으로 와서 자신이 찍은 작품으로 사진전시장을 만든 사람 등 저마다의 사연도 다양하더라. 그 중에서도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터전을 옮겼다는 어떤 이의 이야기는,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까지..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12) 강영숙 - 내가, 나에게 강영숙 | 소설가 편지라는 것은 그나마 기운이 좀 남아 있고 대상과의 거리 조절도 가능할 때 써두는 미래 지향적인 일이야. 실제로 온몸에 힘이 빠져,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과 사투(死鬪)를 벌이는 지경이 되면 편지는커녕 단 한 줄 일기도 못 쓰겠지. 내가 나에게 편지를 남기면서 ‘너’라는 2인칭을 쓰기로 했어. 2인칭은 성공하기 어려운 시점이라서 소설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 어릴 때, 같이 놀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운동장 저쪽에서 가만히 멈춰 있는 축구공과 대면하고 있을 때 너는 죽는다는 일에 대해 생각했었어. 또 경춘선 기차를 타고 흰 눈에 갇힌 경춘가도의 풍경을 내다볼 때, 서울로 가는 게 아니라 죽으러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 사실 너는 늘..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강은교 - J께 강은교 | 시인 J께 드디어 이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길 위에 서서 무수한 것에 답을 요구하는 일도 이제 잠시 접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아, 그러면 당신은 아가페니 에로스니, 니체니… 하고 나오겠지요? 그런 모든 것 그만둡시다. 그저 가장 단순명확한 답을 찾읍시다. 언젠가 오래전 어느 날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아직도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가끔 꺼내 생각하곤 하니까요. 마치 되새김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그때 택시를 탔습니다. 나이 지긋한 기사아저씨는 백미러를 보며 나에게 정중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글쎄요, ..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10) 조재현 - 짜장면과 형 조재현 |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1970년대 초, 서울. 나는 서울의 한복판, 종로구 동숭동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대부분은 판잣집이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샤워 문화’가 당시에는 극소수 상류층만의 특권이었던 시절, 대다수 서민들은 1주일, 혹은 2주일에 한 번꼴로 대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었다. 아니, 묵은 때를 밀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엄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가는 특혜 아닌 특혜를 누리던 그 시절. 가끔 그곳에서 같은 반 여학생을 만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번은 한 독살스러운 여자아이가 그 사람 많은 대중탕에서 “저 남자아이 내보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우는 통에 나는 여탕을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 아이들이 목욕탕에 가는 걸 싫어했다. 퀴퀴한 냄..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9) 오지혜 - 이중현 선생님 오지혜 | 배우 이젠 장학관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래도 제겐 제 아이의 선생님이셨으니 그냥 영원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렵니다. 얼마 전 저는 한 신문사로부터 ‘만약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냐’는 질문과 함께 편지글을 요청받았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가족이었고, 이어서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부부에게 제 목숨보다 귀한 아이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해주신 분이니 가족 다음으로 감사를 드리기에 마땅한 분이시니까요. 아, 그렇죠. 실은 이 감사의 편지는 선생님이 항상 하신 말씀처럼 선생님 한 분이 아니라 학교의 기적을 만들어낸 아이 학교 선생님들 모두에게 드리는 편지라 해도 되겠네요. 아직 젊은데 생을 마치기 전 쓰는 편지를 쓰냐고요? 에이, 죽음이..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8) 장석주 - 모란이 필 때 보았던 당신 장석주 | 시인 여름 초입인데, 햇볕은 벌써 빙초산같이 뜨겁습니다. 정수리를 꿰뚫듯 작열하는 땡볕 아래에서 존재 자체가 곧 녹아내릴 듯합니다. 서운산 산딸나무는 흰꽃을 피우고, 산벚나무 열매는 까맣게 익어갑니다. 오전 내내 감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던 유혈목이는 그늘진 수도가 시멘트 바닥에서 엎드려 쉬고 있습니다. 물통을 들고 나가다가 그의 휴식을 방해할까봐 돌아섭니다. 해가 울울창창한 밤나무숲 너머로 지고, 황혼이 새의 깃털처럼 떨어지겠지요. 날개 달린 것들은 공중에 떠서 날고, 더위에 지친 날개 없는 것들은 지상에서 고즈넉한 저녁을 맞습니다. 내 안에 있는 노동자도 문설주 아래로 내려오는 초록늑대거미를 바라보며 고요합니다. 이 저녁 당신은 멀리 있고 나는 박복한데 그 박복이 데면데면하기만 합니다. 이 불..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7) 조경란 - 남제주군 화순리의 어머니 조경란 | 소설가 어떤 분을 만난 지 하루 이틀 만에 무람없이 ‘어머니’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낯가림도 심하고 제 모친의 말대로라면 사교성이나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제가 말이에요. 제주도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 달랑 주소만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는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제주공항에 도착해 화순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제 마음은 이미 몹시 지친 상태였을 겁니다. 누가 저를 밀어내서 간 것도 아닌데요. 화순 어머니. 돌아보니 그때가 십칠 년 전이네요. 1998년. 그 해, 저에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의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을 하게 되었고 첫 연애까지 시작했던 해였습니다. 오랫동안 집에만 들어앉아 있던 저로서는 실..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6) 이주실 - 안녕, 똥가방 이주실 | 연극배우 며칠 전 넘말, 것절리 친구들이 상추를 싸들고 나한테 왔었어. 먹적골 그 집 밭에 가 상추 솎아내고 고추대 세우는 품앗이를 하고는 뒤란에 앉아 막걸리를 한 잔씩 하고 왔다더구먼. 친구들은 그대가 자꾸 오란다고 툴툴거리면서도 갈 곳 없는 나이에 불러주는 친구가 있으니 행복하다고 했어. 먼저 웃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좋은 친구라고 칭찬하더구먼. 17년 전이었어. 소사북국민학교 졸업 50주년 모임에서 시를 쓰는 농사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저어기… 기억할라나. 먹적골 똥가방이야” 했던 그대. 난 까맣게 잊었다가 그 소리에 알아차렸는데, “웬 루비이통 가방?” 하며 누군가 던진 말에도 그대는 맑은 웃음으로 답했지. 그 자리에서 그대는 “내가 공부는 영 담을 쌓아 ‘머.. 더보기
[내 인생 마지막 편지](5) 권여선 - 나의 사랑 강쥐에게 권여선 | 소설가 오래전에 어느 점쟁이가 그랬다고 우리 엄마가 말했지. 당신 막내딸 쉽게 시집 못 간다고. 엄마는 깜짝 놀랐지. 하지만 점쟁이는 느긋하게 그랬대. 걱정할 것 없다고, 늦게라도 눈이 뒤집혀 시집 보내달라고 날뛰는 날이 온다고, 그때 냉큼 보내면 된다고. 엄마는 까맣게 잊었겠지만 마흔 살에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점쟁이를 생각했지. 당신과 결혼하지 못하고 떠나게 돼서 슬픈 건 아니야. 결혼한다고 우리에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당신 딸에게 쌍꺼풀 수술을 못해주고 가는 게 더 마음에 걸려. 나는 당신 딸을 직접 만난 적이 없지. 당신이 보여준 사진 속에서 그 아이는 앞머리를 눈까지 내려오도록 덮고 있었어. 눈이 작아 그런가 싶어 꼭 쌍꺼풀 수술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 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