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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12) 강영숙 - 내가, 나에게

 

강영숙 | 소설가

 


편지라는 것은 그나마 기운이 좀 남아 있고 대상과의 거리 조절도 가능할 때 써두는 미래 지향적인 일이야. 실제로 온몸에 힘이 빠져,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과 사투(死鬪)를 벌이는 지경이 되면 편지는커녕 단 한 줄 일기도 못 쓰겠지. 내가 나에게 편지를 남기면서 ‘너’라는 2인칭을 쓰기로 했어. 2인칭은 성공하기 어려운 시점이라서 소설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

 

어릴 때, 같이 놀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운동장 저쪽에서 가만히 멈춰 있는 축구공과 대면하고 있을 때 너는 죽는다는 일에 대해 생각했었어. 또 경춘선 기차를 타고 흰 눈에 갇힌 경춘가도의 풍경을 내다볼 때, 서울로 가는 게 아니라 죽으러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 사실 너는 늘 살기 위해서 죽음을 떠올렸지. 죽음과 친근해질 때까지 그 이미지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즐겼지. 그러니 너 이 편지에서도 별로 할 말 없지 않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쓰는 편지니까 뭐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지. 에계계 인생 이게 다입니까?

 

너는 늘 욕심이 많고 지나치게 진지했어. 즐길 줄도 몰랐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늘 뭔가와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살았어. 너는 영화를 보는 순간조차도 영화와 싸우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너는 좀처럼 한번 사랑한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 상대가 아무리 변해도 애초에 그 대상에 대해 가진 마음은 바꾸지 않는 미련한 면도 있었어. 그래서 크게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뭐 중요한 건 네가 사랑했다는 것이니까.

 

소설가 강영숙 l 출처:경향DB

 

사실 너는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 하지. 침대나 병상 문학 장르에 도전하겠다는 야심도 있고. 요즘 너는 매일 쓰고 다시 고쳐 쓰고 또 읽고 하는 일의 숭고함이랄까 하는 걸 막 깨달아 가는 시점에 있는 것 같아. 그러나 또 동시에 너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지. 케이크나 아포가토 같은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잘 해소되지 않는 피로의 두께. ‘사는 게 뭐 이렇게 지리멸렬한가’라고 너의 친구 K가 말했을 때 너는 K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만져주기만 했지. 늙어서도 뭘 쓰겠다는 건 네가 사는 걸 전혀 모르고 한 생각인 것 같아. 그렇지 않니?

 

너는 빨강을 좋아하지. 그리고 검정도 좋아하지. 한때는 블루의 세계에 빠져 살았어. 늘 굶어 살다가도 먹을 때는 정말 많이 먹지. 폭식가의 주메뉴는 내장탕이나 추어탕 같은 것들. 그리고 시고 단 사과를 좋아하지. 가끔 입지도 않을 옷을 사기도 하고, 그 옷은 십 년 넘게 옷장에 걸려 있지. 잭슨 폴록 원화를 본 연도와 장소를 다 기억하고 있어. 뉴욕 휘트니미술관의 어느 방에 들어갔을 때 왼편에 윌렘 드 쿠닝, 중간에 마크 로스코, 오른편에 잭슨 폴록의 그림이 있었어. 뉴욕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작품 앞에서 넌 행복하게 웃었지. 언젠가 그것을 소설로 써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직 쓰지 못했어. 그리고 뭐 너는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모두 다 문서분쇄기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려고, 이런 일을 대행하는 회사를 찾아두겠지. 네가 쓴 것들, 쓰레기들을 다 버리는 일을 해주는 회사 말이야.

 

그럼에도 너는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하지. 도시 사람들의 잔잔한 일상이 드러나고 그 일상이 시간에 의해 조금씩 파괴되고 마모되어 가는 느낌을 유장하게 쓰고 싶어 하지. 걸을 때 들을 수 있는 옷깃 스치는 소리, 몸에 남아 있는 지난 계절의 흔적, 바다가 우는 소리 같은 것들을. 그것 말고도 고양이도 키워보고 싶고 강아지도 키워보고 싶지. 화초 같은 것들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고 마술처럼 요리도 잘해보고 싶지만 뭐. 너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고 결코 그런 작품을 쓰지도 못했어. 어쩌면 쓰고 싶은 것과는 정반대의 세계를 꾸며놓았지. 너 왜 그랬니? 마지막이라고 가정하고 쓰는 이 편지에서조차도 왜 그랬는지 말 못한다면 이제부터 이 편지를 매일 써보는 건 어때? 너에게 말이야. 그럼 너의 일상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너의 글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