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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강은교 - J께

강은교 | 시인

 

 


J께 드디어 이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길 위에 서서 무수한 것에 답을 요구하는 일도 이제 잠시 접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아, 그러면 당신은 아가페니 에로스니, 니체니… 하고 나오겠지요?

 

그런 모든 것 그만둡시다. 그저 가장 단순명확한 답을 찾읍시다.

 

언젠가 오래전 어느 날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아직도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가끔 꺼내 생각하곤 하니까요. 마치 되새김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인 강은교 ㅣ 출처:경향DB

 

나는 그때 택시를 탔습니다. 나이 지긋한 기사아저씨는 백미러를 보며 나에게 정중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글쎄요, 어려운 게 아니라면요…”라고 나는 대답했죠. 그는 용기를 얻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는 요즘 한 여자를 사귀고 있는데, 그녀는 정부 보조비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생활보호 대상자로서 장애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쌀, 반찬거리를 사주기도 하고, 옷을 사다 주기도 해요”라고 그 기사는 쑥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참, 좋은 일을 하고 계시네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더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제가 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자식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한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비로소 나에게 질문하고 싶은 문제가 나왔어요. “글쎄요? 제가 어떻게….” 나는 좀 곤혹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옷을 사들고 가면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어요. 옷뿐이 아니에요. 무얼 주면 그렇게 행복하답니다. 일찍이 그런 경험은 없었어요. 그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이 나이에 택시를 몬답니다. 자식들도 다 출가했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저는 원래 버스기사였고 모범가장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살 만해진다고 생각했을 때 마누라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진단 결과 위암 말기였지요. 결국 가버렸어요, 고생만 하다가 가버린 셈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그 여자가 마누라를 닮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답니다. 마누라한테 무엇인가 해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리거든요.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나 봅니다.” “그 여자를 무척 사랑하시나 보죠?” 나의 말에 그는 쑥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자식들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라고 합니다. 하긴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이야길 자식들한테 믿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사랑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은? 두 개가 다 같은 것인지?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 무엇인가 주고 싶은 것, 연민인 것, 연민이면서 동정이면서 에로스이면서 아가페인, 그래서 선물이라는 것이 연인 사이에선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닐까요? 전혀 대가성을 생각한 것이 아닌 선물, 그것이 사랑이란 것이 아닐는지요? 아니라고요? 실은 자기한테 선물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므로 가장 진한 사랑은 짝사랑이라고요? 자기에 대한 갈증이라고요? 영원한 나르시시즘이라고요?

글쎄요, 자기에 대한 갈증이든 아니든, 그것에 대한 영원한 답은 없는 것이겠지요. 부처도 예수도 오답을 했던 것…. 나도 사랑을 했지만요. 젊은 시절엔 꽤 여러 번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지요. 그래서 이런 시가 요즘엔 나오기도 했지요.

 

‘그 집은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신혼시절 제일 처음 얻었던 언덕빼기 집/빛을 찾아 우리는 기어오르곤 했어//(중략)//그 창문도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싸구려 커튼이 밤낮 출렁거리던 그 집/자기들이 얼마나 멀리 아랫동네를 바라보았는지를/그 자물쇠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자기들이 얼마나 단단히 사랑을 잠글 수 있었는가를/(중략)//새벽은 천천히 오곤 했어/그러나 가장 따뜻한 등불을 들고/그대를 기다리곤 하던 그 나무계단을 잊을 순 없어/가장 깊이 숨어 빛을 뿜던 그 어둠을 잊을 순 없어//아, 그 벽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저녁이면 기대 앉아 커피를 마시던/그 따스한 벽/환상의 거미 날아오르던 곳/자기가 얼마나 튼튼했는지를/사랑의 잠 같았는지를’ <필자의 시, ‘그 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