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16) 장석남 - 화가 장승업 선생께


장석남 시인

 

 

 

저편에 계신 장승업 선생님.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그 세계에 가야만 하고 이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왜 문득 선생을 수신인으로 하고 싶었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사와 같은 것입니까? 그와는 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세계이기에. 그 두려움을 이기고자 한 것이 철든 이후의 내 삶 전체였는지도 모릅니다. 인류 전체가 어쩌다 잘못 들어서게 된 문명이라는 미로가 모두 그런 것만 같습니다. 만약 얼마간의 명예와 얼마간의 알량한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그 두려움을 감추고자, 혹은 외면하고자 한 방편들, 방패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들, 사랑의 기억들, 그것들도 마찬가지!

 

선생은 무엇을 찾아 헤매었습니까. 눈을 찔러가면서 무엇을 구했습니까. 혹 사랑을 찾아 헤맨 것은 아니었습니까? 어쩌면 나는 일생 사랑의 정의를 찾아 헤매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사랑을 사전의 항목에 넣어보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핵심을 내 몸뚱이와 내 정신 속으로 관통시키고 싶은 심대한 야심이 있었습니다. 나는 보기보다 야심가였습니다. 나는 초가삼간에 머물러 살고 싶었으나 그 야심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고 애초부터 야심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에 의한 감전상태의 삶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좋았을까’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방법을 알 수 없었고 실마리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용기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완성하는 것인 모양입니다. 용기가 있으려면 신념이 필수일 텐데 무엇을 신념할 수 있단 말인지 이때까지도 종종무소식입니다. 사랑과의 거리가 없는 삶. 사랑을 내려다볼 수 없는 속도에 의한 간격 없는 삶만이 한번 난 인생을 종결짓는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시인 장석남 ㅣ 출처:경향DB

 

난 당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당신에 대한 풍문을 풍문으로 접했을 뿐입니다. 그 풍문만으로도 나는 당신의 마음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그린 매의 눈빛을 본 적 있습니다. 그 눈빛 속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사랑의 눈빛입니다.

 

육체는 여자에 떨었고 그 떨림을 숨기느라 죽을 힘을 다해 애썼고 이름은 연잎 위의 이슬로 굴러다녔으며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균형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모두 가을 서리 앞에 적막한 것인 줄 모르지 않았으나 그러한 노고 끝에 이제 관절은 삐걱입니다.

 

나의 그 노고는 많은 이들을 아프게 했을 것이고 나 자신은 눈치도 채지 못할 분노도 만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무화하기 위해 헌금바구니에 돈다발을 넣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의 생존을 도모한 행위에 정당한 목청을 돋우고 싶습니다. 싱싱한 야생적 목청을 돋우고 싶습니다. 선생의 말년이 왠지 그러했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효자이고 싶었습니다. 하나 효자이지 못했습니다. 구부러져가는 노모의 허리와 무릎, 신음소리에 되레 역정을 내기가 일쑤였고 가슴이 저려오면 그것으로 죗값을 치른 것으로 덮어버리는 사악한 내면의 균형추까지도 만들어놓는 간교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효자이고 싶었을까요.

 

나는 따스한 아버지이고 싶었습니다. 두 아이가 어떻게든 생겼으니 독립할 때까지 충실히 기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 크게 미진했습니다. 그러나 출가가 꿈이었던 내딴에는 그만한 것도 아주 잘한 일입니다. 아이들의 파안대소가 눈에 선합니다. 나는 일생 수준 미달의 연인임에 대해서 개의치 않았고 평균 이하의 남편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무엇, 더 영근 생명의 핵심을 찾아보려 두리번댄답시고 그리했습니다. 나를 강하게 이끌고 가는 사랑이 언제 올 것인가. 아니면 언제나 내 속에서 샘솟을 것인가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끝내 사랑은 멈출 것임을 예감합니다. 선생은 당신이 그린 매의 눈빛 속으로 잠겨갔을 것인데 나는 내가 그린 시의 눈빛에 감겨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보다 나는 오만하게도 사랑의 감전 상태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가속도에 의해 떠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빨래를 내다 걸 듯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아도 되는 빨래처럼 숨을 널어놓고 싶습니다.